[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直不疑, 불의에 변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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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여씨를 위할 자는 오른쪽, 유씨를 위할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爲呂氏右袒, 爲劉氏左袒)."
한(漢)의 고조 유방이 죽은 뒤 15년간 권력을 농단해온 여후(呂后) 일족의 천하는 국방장관 주발(周勃)의 이 한마디 선언으로 끝장났다. 쿠데타를 일으킨 선제의 공신들은 고조의 넷째 아들 항(恒)을 새 황제로 옹립했는데, 과연 건국원훈들이 중흥의 제왕을 알아보는 안목은 탁월했다.
문제(文帝, 재위 BC 180~157년)는 새로운 공사판을 벌이지 않고 검정색 비단옷만 입는 질박한 황제였을 뿐만 아니라 만사를 순리에 맡기고 무리하지 않아 온 나라가 무사안정을 노래했다.
공자의 말처럼 황제가 '우아하면서 질박한(文質彬彬)'군자의 풍모를 지녔으니, 물이 아래로 흐르듯 9경(卿)이 그랬고 세상의 기풍 또한 그랬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자신보다 두 세대를 앞선 이 시대를 살았던 인물을 상당수 다뤘는데, 그 열전이 깊은 재미를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직불의(直不疑)는 문제의 비서관(郎官)이었다. 하루는 같은 관사를 쓰는 사람이 휴가를 떠나면서 다른 사람의 황금을 가지고 갔는데, 황금 주인은 무턱대고 불의를 의심했다. 불의는 자신이 그랬다고 사죄하고 황금을 사서 주었다. 얼마 후 휴가에서 돌아온 사람이 잘못 가져갔다며 황금을 돌려주자 황금주인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 <사기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의심할 수 없다'는 흔치 않은 이름이 실제 이름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불의는 훗날 또 이름값을 하게 된다. 황제의 신임으로 대부(大夫)로 승진한 그에게 비방이 쏟아졌다.
"불의는 용모가 몹시 아름다운데 형수와 자주 사통하니 될 말인가!"
"그런데 나는 형님이 없다(我乃無兄)."
요샛말로 하면 '바람둥이 생긴대로 논다' 식의 인신공격에 대해서 불의는 원천무효를 지적했을 뿐 변명을 하거나 시비를 따지려고 들지 않았다. 사마천은 불의가 노자(老子)를 배워 매사를 떠벌이지 않고 명성얻기를 두려워한 독행군자(篤行君子)였다고 평하고, 사람들이 그를 덕망 높은 장자(長者)라고 칭송했다고 거듭 기록해 놓았다.
불의에도 변명하지 않은 그의 이야기는 조선조 <성종실록>에도 나온다. 이조판서였던 강희맹(姜希孟)이 그를 비방하는 투서사건에 휘말렸다. 생원 이원좌의 이름으로 된 투서는 세도를 누리던 강희맹의 부패와 독직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키는 작고 배는 나왔는데 뱃속에는 탐욕이 가득찼으며, 뇌물이 구름처럼 모이고 관리의 임면을 제멋대로 한다. "
성종은 투서 작성자가 가공인물임이 밝혀지자 고발내용 자체를 '근거없다'고 일축하고 강희맹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그는 한 달 후 다시 올린 상서에서 불의를 빗대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옳고 그름은 자연히 밝혀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다행이고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는 나의 불행이니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오직 믿을 것은 하늘의 바름(正)과 인심의 공변됨(公), 그리고 신명의 곧음(直)뿐이다. 신이 생각건대 옛날 직불의가 변명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비방을 그치게 하는 데는 변명하지 않는 것이 최선(止謗莫如無辨)'이라고 함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조선의 불의'는 막상 이 말과는 달리 본론에서 투서 내용을 조목조목 해명하고 장황하게 반박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투서 내용이 '조정을 탁란(濁亂)케 하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의리상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쨌든 옛날의 관리들은 처신이 문제되면 빈말이라도 먼저 사직상서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요즘 세태는 임면권자는 물론 당사자까지 '먼저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벼른다. 그러는 사이에 명예는 상처받고 세상은 거칠어져만 간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
한(漢)의 고조 유방이 죽은 뒤 15년간 권력을 농단해온 여후(呂后) 일족의 천하는 국방장관 주발(周勃)의 이 한마디 선언으로 끝장났다. 쿠데타를 일으킨 선제의 공신들은 고조의 넷째 아들 항(恒)을 새 황제로 옹립했는데, 과연 건국원훈들이 중흥의 제왕을 알아보는 안목은 탁월했다.
문제(文帝, 재위 BC 180~157년)는 새로운 공사판을 벌이지 않고 검정색 비단옷만 입는 질박한 황제였을 뿐만 아니라 만사를 순리에 맡기고 무리하지 않아 온 나라가 무사안정을 노래했다.
공자의 말처럼 황제가 '우아하면서 질박한(文質彬彬)'군자의 풍모를 지녔으니, 물이 아래로 흐르듯 9경(卿)이 그랬고 세상의 기풍 또한 그랬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자신보다 두 세대를 앞선 이 시대를 살았던 인물을 상당수 다뤘는데, 그 열전이 깊은 재미를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직불의(直不疑)는 문제의 비서관(郎官)이었다. 하루는 같은 관사를 쓰는 사람이 휴가를 떠나면서 다른 사람의 황금을 가지고 갔는데, 황금 주인은 무턱대고 불의를 의심했다. 불의는 자신이 그랬다고 사죄하고 황금을 사서 주었다. 얼마 후 휴가에서 돌아온 사람이 잘못 가져갔다며 황금을 돌려주자 황금주인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 <사기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의심할 수 없다'는 흔치 않은 이름이 실제 이름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불의는 훗날 또 이름값을 하게 된다. 황제의 신임으로 대부(大夫)로 승진한 그에게 비방이 쏟아졌다.
"불의는 용모가 몹시 아름다운데 형수와 자주 사통하니 될 말인가!"
"그런데 나는 형님이 없다(我乃無兄)."
요샛말로 하면 '바람둥이 생긴대로 논다' 식의 인신공격에 대해서 불의는 원천무효를 지적했을 뿐 변명을 하거나 시비를 따지려고 들지 않았다. 사마천은 불의가 노자(老子)를 배워 매사를 떠벌이지 않고 명성얻기를 두려워한 독행군자(篤行君子)였다고 평하고, 사람들이 그를 덕망 높은 장자(長者)라고 칭송했다고 거듭 기록해 놓았다.
불의에도 변명하지 않은 그의 이야기는 조선조 <성종실록>에도 나온다. 이조판서였던 강희맹(姜希孟)이 그를 비방하는 투서사건에 휘말렸다. 생원 이원좌의 이름으로 된 투서는 세도를 누리던 강희맹의 부패와 독직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키는 작고 배는 나왔는데 뱃속에는 탐욕이 가득찼으며, 뇌물이 구름처럼 모이고 관리의 임면을 제멋대로 한다. "
성종은 투서 작성자가 가공인물임이 밝혀지자 고발내용 자체를 '근거없다'고 일축하고 강희맹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그는 한 달 후 다시 올린 상서에서 불의를 빗대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옳고 그름은 자연히 밝혀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다행이고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는 나의 불행이니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오직 믿을 것은 하늘의 바름(正)과 인심의 공변됨(公), 그리고 신명의 곧음(直)뿐이다. 신이 생각건대 옛날 직불의가 변명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비방을 그치게 하는 데는 변명하지 않는 것이 최선(止謗莫如無辨)'이라고 함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조선의 불의'는 막상 이 말과는 달리 본론에서 투서 내용을 조목조목 해명하고 장황하게 반박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투서 내용이 '조정을 탁란(濁亂)케 하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의리상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쨌든 옛날의 관리들은 처신이 문제되면 빈말이라도 먼저 사직상서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요즘 세태는 임면권자는 물론 당사자까지 '먼저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벼른다. 그러는 사이에 명예는 상처받고 세상은 거칠어져만 간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