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말 첫 딸이 태어났다. 아내 품에서 자그마한 입을 벌려 하품을 해대는 딸아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앞으로 1년간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살기로 했다. 모진 선택이었지만 그래야만 했다. 13년 만에 도전하는 대학공부를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와의 약속이 먼저였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이승희씨(31)는 지난 3일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회사 인근에 집을 얻어 살고 있던 그가 기숙사행을 선택한 것은 공부 때문이었다.

이씨가 입학한 학교는 삼성전자가 1999년부터 반도체 · LCD의 생산과 설비를 담당할 핵심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사내대학인 삼성공과대학.3년 만에 정규 학사과정을 마친다는 점을 빼면 여느 대학과 똑같이 진행된다.

삼성공과대 입학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월급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이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선 부서장 추천이 필요했는데 그는 솔직하게 "반도체가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일만 해왔다"며 부서장을 설득했다.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애둘러 표현한 것.지난 1월부터 5주간 학교다닐 때 손놓았던 고등학교 수학, 물리, 화학 과정을 하루 8시간씩 공부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비일비재해 이씨는 눈물을 쏟으며 공부를 했다. 그렇게 이씨는 32명으로 제한된 입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씨가 만학(晩學)에 뛰어든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중학교 시절 죽기보다 공부가 싫었다. 그래서 그 길로 구미전자공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6년 삼성전자에 들어와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하게 됐지만 꿈이라고는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와 삼성공과대를 마치고 삼성그룹 내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탄 선배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씨는 "지난 13년간 아무것도 모른 채 일해 온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책을 멀리했던 그에게 대학공부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주변에선 "불황으로 남들은 취직도 어렵다는데 회사에서 돈 받아가며 공부한다"며 부러워했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까봐 이씨는 두려움을 내색하지 못했다. 힘이 돼 준 것은 가족들이었다. 지난해 9월 결혼해 갓 아이를 낳은 아내는 "걱정말라"며 응원을 해줬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난생처음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게 된 이씨는 비메모리(시스템LSI) 분야의 설비 전문가를 첫 목표로 삼았다. 반도체 주 원료가 되는 실리콘 웨이퍼에 산화막을 입히는 공정에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자신의 본업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는 "세계 비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 점유율이 높지 않지만 언젠가는 세계 1위가 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며 "공부를 마치는 3년 후를 기대해도 좋다"고 웃었다.

기흥=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