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고종은 국새도 비밀리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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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황제어새' 공개 의미
고궁박물관, 美 교포로부터 구입…1901~1903년 제작 추정
국새와 사용된 문서 함께 발견된 것은 처음…국보급가치
고궁박물관, 美 교포로부터 구입…1901~1903년 제작 추정
국새와 사용된 문서 함께 발견된 것은 처음…국보급가치
"짐은 대덕국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에게 이런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독일 황제에게 이 같은 내용의 친서를 썼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황제의 도장인 국새(國璽)를 찍었다. 문화재청이 재미교포 소장가로부터 구입해 17일 공개한 '황제어새( 帝御璽)'는 바로 이 국새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고종 황제의 국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칙령지보''대원수보''제고지보' 등 3점과 함께 모두 4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국새가 사용된 문서와 함께 확인된 것은 이번 '황제어새'가 처음이어서 국보급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새와 어보(御寶)=왕조의 임금이나 황제의 도장은 공문서나 친서 등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와 왕실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의례용 어보로 나뉜다. 국새는 사무용,어보는 의례용이다.
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든 국새는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한 반면 구리와 은의 합금으로 만든 어보는 기법이 굵고 덜 정치하며 크기도 어보가 국새보다 4~5배나 된다.
특히 국새는 실무용이기 때문에 궁내부에서 보관하지만 어보는 왕이나 황제가 죽은 뒤 종묘에 의례용으로 안치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까닭에 현재 어보는 330점가량이 남아 있으나 국새는 조선의 역대 왕들이 많이 만들어 썼음에도 고종 황제가 사용한 4점만 확인된 상태다.
문화재청이 이날 공개한 '황제어새'는 고종 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국새의 하나다. 고종 황제는 용도에 따라 칙서용인 '칙령지보',군(軍) 인사용인 '대원수보',공문서용인 '황제지보' 등 여러 종류의 국새를 사용했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대한국새''황제지새' 등 13과의 국새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는 친서에 사용된 두 종류의 국새 가운데 하나로 나머지 하나는 아직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황제어새는 어떤 국새?=황제어새는 원래 내함과 외함이 함께 있었으나 외함은 분실된 채 내함만 돌아왔다. 황동으로 만든 내함은 상단에 국새를,하단에 인주를 넣을 수 있도록 2단으로 짜여졌고 국새는 도장 몸체와 거북형 손잡이로 구성돼 있다.
성분 분석 결과 거북형 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 대 18인데 비해 몸체는 그 비율이 57 대 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가로 · 세로 5.3㎝의 정사각형 인장면에는 ' 帝御璽'라는 네 글자가 양각돼 있으며 이 중 황제의 '皇(황)'은 통상 '흰 백(白)' 아래에 '임금 왕(王)'을 두는 것과 달리 '白' 대신 '스스로 자(自)'를 쓴 점이 특징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공개한 '황제어새'는 '대례의궤' 등에도 제작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황제어새,어떻게 확인했나=해외반출 문화재의 국내 환수를 위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던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미국의 한 재미교포가 국새를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후 고궁박물관과 문화재청은 전각,금속공예,서체,매듭 등 각 분야별로 모두 10여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진위 여부를 확인한 다음 '황제어새'를 구입했다.
이들이 '황제어새'를 진품으로 확인한 결정적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 사진이다. 고종 황제는 독일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쓰기 전에 초고본을 써서 이를 일부 손질해 보냈는데 그 초고본을 찍은 유리원판을 국편이 갖고 있었던 것.
또 국편은 최근 독일에 있는 이 친서의 원본을 촬영해 왔으며 전문가들이 감정한 결과 초고본과 원본,황제어새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설명이다.
고종 황제의 국새를 찍어 독일 황제를 비롯해 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의 군주에게 보낸 친서는 지금까지 10여 통 발견됐으며 이 중 국새와 그 국새가 사용된 문서가 함께 확인되기는 '황제어새'가 처음이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는 공문서에 주로 사용된 '대한국새''황제지보' 등과 달리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으로 봐서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 황제가 직접 지니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직접 이 국새를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긴박하고 어려웠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