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부품이 대단하지 않은 것 같죠? 그렇지만 고무부품이 없다면 기계나 전자제품은 물론 자동차,배까지 모두 고장납니다. "

고무패킹 및 선박 · 플랜트용 고무부품 제조업체인 명진티에스알의 조시영 대표(43)는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 제품이 안 쓰이는 데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명진티에스알이 만드는 제품의 종류는 무려 1000여가지가 넘는다. 가장 많은 종류의 고무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업체로 손꼽힌다. 선박이나 플랜트 제조에 쓰이는 대형배관과 댐 및 간척지 갑문의 누수를 막는 실딩(Shielding)분야에서는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하며 단연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국내의 모든 댐과 새만금간척지의 갑문에도 명진티에스알의 제품이 들어갔다. 이 회사는 현대중공업,LG전자 및 삼성중공업 등 국내 대기업과 세계 10여개국에 제품을 공급하며 연 평균 약 7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진티에스알의 창업주 조용국 회장(72)은 1963년 국립수산대학(현 부경대학)어로학과를 졸업한 후 시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고위직에 오르려면 수십년 걸리는 공무원은 비전이 없다는 판단에 다른 길을 찾던 중 1966년 고무제조업을 하던 지인에게서 동업을 제안받고 사업에 첫 발을 디뎠다. 지인은 생산,조 회장은 영업을 주로 맡았다. 신발 밑창과 고무장화 등을 주로 생산해 신발업체나 고무장화를 취급하던 작은 상점에 납품을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적었다. 소규모 거래처가 많아 수금이 어렵고 영업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조 회장은 "다들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이라 수금하러 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자리를 떴거나 돈이 없다며 안 주기 일쑤였다"며 "거래도 크고 돈도 잘 받을 수 있는 큰 분야를 뚫어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73년 동업을 청산하고 부산 송정동에 명진고무공업사라는 회사를 세웠다. 조 회장은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 덕에 혼자서도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1973년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전자제품용 고무패킹을 자체 개발,금성사(현 LG전자)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단가가 외국 제품의 50%도 안 됐지만 품질은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회사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다. 70년대 후반부터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자동차용,선박용 고무부품을 자체 개발해 공급했다.

80년대 들어 매년 20%이상의 매출신장세를 보이며 연간 60억원어치를 판매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회사는 1990년 초 위기를 맞는다. 거래처였던 대기업 H사가 최소 월 3000만원어치를 구매할 테니 공장을 새로 세우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울산에 덜컥 9900㎡의 부지를 사고 빚까지 내 당시 회사의 9개월치 매출에 가까웠던 약 40억원의 자금을 투자,제 2공장을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조 회장은 "수주량이 예상치의 절반도 안 되는 데다 현금이 모자라 빚 갚을 길이 막막해 공장증설 뒤 3년 만에 폐업을 생각할 정도로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조 회장은 결국 2남1녀 중 장남인 조시영 대표에게 'SOS'를 쳤다. 당시 대학(동국대 회계학과 86학번) 졸업 후 삼성중공업에서 3년째 경리 및 관리업무를 보던 조 대표가 회사의 위기극복에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조 대표는 입사를 두고 몇 달간 고민했다. 조 대표가 근무하던 부서의 팀장은 당시 삼성에서 부산지역을 거점으로 추진하던 자동차사업 쪽에 발령을 내 줄 테니 회사를 다니며 퇴근 후 아버지의 일을 도우라며 퇴사를 말렸다. 장고 끝에 결국 조 대표는 아버지를 돕기로 결심하고 2005년 회사의 관리과장으로 입사했다. 조 대표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가업승계는 생각도 안 해봤고 '폼'나게 대기업에 다니고도 싶었지만 어려운 처지의 아버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1995년 회사의 '구원투수'로 들어온 조 대표는 이듬해부터 구조개편에 들어갔다. 부산 본사에서는 전자제품용 부품이나 소형 고무제품을 만드는 것에 치중하고 울산공장에서는 플랜트나 선박용 배관부품 등 대형 제품에 집중하는 등 각 공장의 전문화를 추진한 것.당시 회사에서 생산하는 물건은 800가지가 넘었는데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여유가 있는 곳에서 만들다보니 일관성을 잃어 생산효율이 낮아지고 전문성도 떨어져 품질이 나빠지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3년여에 걸친 개편이 진행되면서 생산효율이 20%이상 높아졌고 품질도 한층 좋아졌다. 조 대표는 "국내에서 가장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회사의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택한 방법"이라며 "대기업에서 배운 관리 업무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여기에 90년대 말 인천에 대규모 LNG물류단지가 들어서면서 배관부품 수요가 대폭 늘어 매년 70억~100억원씩 매출이 증가하며 회사는 상승궤도를 다시 타기 시작했다. 조 대표는 "일주일에 2~3일씩 철야작업을 하더라도 30% 이상 증산하기 힘든 상황에서 주문은 평소의 2~3배 수준으로 늘어나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조 대표는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 대표직을 물려받았다. 취임한 뒤 그는 회사의 먹을거리를 늘리기 위해 매년 20~30가지씩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조 대표는 "마케팅도 영업도 중요하지만 성공적으로 대를 이어가는 회사를 만들려면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부산=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