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66)은 하루를 '25시간'으로 산다. 시간을 쪼개 가며 활동하는 게 몸에 배어 있지만 '생소한 일'을 하는 요즘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소장품 목록 점검,전시기획 회의,미술관 업무 조율,해외 전시 유치 준비,공연 및 전시행사 참석,KAIST 강의(계약에 따라 5월까지 강의해야 한다)….

업무가 끝난 후에도 문화계 인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보통 저녁 10시.인생의 절반을 산업 현장과 강단에서 보낸 배 관장은 '문화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한 후 한 달 동안 이런 일들에 빠져 살았다. 하는 일의 내용은 달라졌지만 특유의 뚝심은 여전해 보였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KAIST 사무실에서 만난 배 관장은 "21세기는 문화가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 변화,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시대"라며 "미술을 통해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면 미술 분야에도 '탱크주의 마케팅'과 과감한 투자,선진화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술문화 선진화에 대한 그의 소신은 뚜렷하다. 한국도 미국 프랑스 영국처럼 대형 현대미술관을 지어 세계적인 문화 명소로 키워야 한다는 것.미국의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비롯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영국의 테이트모던 등 해외 대형 미술관들이 미술문화를 수출하면서 외국 관광객을 불러모아 자국의 이미지를 높이듯 우리도 이를 따라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경복궁 옆 기무사 터에 3000여억원을 들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을 지으면서 한국 미술의 새판을 짜 보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데다 민간 기업 CEO 출신이어서 국립현대미술관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21세기는 문화가 경제의 동력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술 분야에도 전문 경영기법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해 왔어요. 뉴욕 현대미술관과 영국의 테이트모던은 연간 2조원을 쏟아부으며 세계적인 미술 거장들을 키우고 다양한 '문화 아이콘'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빨리 현대 미술의 '판'을 키워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요. 미술관 운영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을 주축으로 2012년 기무사 터에 완공될 서울관,덕수궁미술관 등으로 삼원화시켜 시스템으로 관리할 겁니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까.

"대우그룹에 있을 때 광산 지역인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건설을 구상 단계부터 지켜봤어요. 특수강 원산지였던 곳에 미술관이 건립되자 철강 산업까지 활기를 찾더군요. 파리 슬럼가에 세워진 퐁피두센터 역시 세계 최고의 아트 뮤지엄으로 각광받으면서 매년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문화 명소가 됐고요. 늦어도 2010년 말 착공하는 서울관은 도심의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퐁피두센터를 벤치마킹할 생각입니다. 회화,조각,비디오 영상 설치미술,공연장,영화관 등을 집대성한 5층 규모의 '문화 도서관' 형태로 꾸미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

▼1990년대 대우전자 사장 시절 '고장 안 나는 제품'이란 차별화 마케팅 전략을 쓰셨지요. '탱크주의'를 미술관 운영에도 도입할 생각이신가요.

"'탱크주의'는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참다운 소비자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했지요. 미술관 운영도 마찬가지로 관람객의 만족을 높이는 데 충실해야 한다고 봅니다. 미술품 소장,전시,교육의 3대 기본 기능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미술 탱크주의'이지요. 요즘 현대 미술은 회화,조각,영상,음악,무용 등이 융합하는 추세로 가고 있어요. 우리는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점에서 더 유리합니다. IT와 작가의 창의성이 합쳐지면 세계적인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미술이 다른 예술 분야보다 국가경쟁력 제고에 더 유리하다고 보시는지요.

"미술도 국가를 살찌우는 일종의 산업이죠.피카소와 앤디 워홀,데미언 허스트 등 세계적인 미술가들이 국가와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잖아요. 최근에는 웨민준 장샤오강 등 중국 현대 화가들의 작품이 미국 유럽 등에서 고가에 팔리면서 공산품에도 '차이나 프리미엄'이 붙었어요. 미술은 국가 · 기업 브랜드 가치를 높여 주는 핵심 분야입니다. "

▼미술관을 국제적인 규모로 육성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어떻게 이끌어 낼 건가요.

"국립현대미술관을 세계적인 전시 공간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기존의 250억원보다 10배 정도로 늘려야 합니다. 그것도 부족해요. 그래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미술문화 교육사업을 펼쳐 후원금을 확보할 생각입니다. 요즘 CEO들은 문화 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시간을 내서 미술을 배우러 다니는 CEO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요. 그만큼 미술이 상품 디자인과 트렌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이지요. 그들에게 다양한 문화 체험과 지식을 전달하면서 자금도 유치하고 홍보도 할 겁니다. 기업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서울대,홍익대와 연계해 미술관에서 직접 학위(미술사,미술기획,미술경영)를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

▼미술행정 경험은 없으나 미술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왔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그림을 좋아하셨는데 몇 살 위인 이응로 화백과 친했지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막내는 화가 시키라'고 할 정도로 미술에 애착이 강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경기고) 때 미술반 활동을 했습니다. 건축과를 지망했다가 막판에 기계공학과(서울대)로 전공을 바꾼 이유도 당장 취직할 수 있는 데다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서였죠.화가인 아내(신수희씨 · 65)와 결혼했고 그런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아들(정완 · 35)이 건축가 겸 설치미술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딸(희영 · 32)도 예술 이론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죠."

▼미술을 좋아하는 것과 미술관을 경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요.

"미술관장이 갖춰야 할 자질로 '미술에 대한 전문성'과 '경영 마인드'를 꼽는 것 같습니다. 미국 미술관의 경우 전시 기획은 큐레이터에게 맡기고 관장은 후원금 모금에 무게를 둡니다. 유럽 쪽은 큐레이터 출신 관장이 기획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고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당장 현대 미술의 '판'을 바꾸고 키워야 하기 때문에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미술관에는 전문적인 업무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관장은 그런 전문가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지요. "

▼미술관 운영 주체로 소비자인 국민,그리고 정부,기업에 전할 말이 있다면….

"대우그룹에 재직할 때 다양한 문화를 후원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본 거죠.개인도 적은 돈이지만 화가들의 그림을 사 줌으로써 미술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정부 또한 대중적 미술문화 지원 운동이나 캠페인 등을 벌이는 게 필요합니다. 경기가 침체되어 있을수록 정신적 즐거움을 줘야 하는 게 미술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