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의 분노 비우고 희망을 채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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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후원, 영월 법흥사 '실직가장 템플스테이'
법당 안엔 정적만 흘렀다. 가부좌를 튼 사람들의 표정은 엄숙했다. 온갖 고민과 번뇌로 괴로운 듯 몇몇의 미간에는 주름이 가득 잡혔다. 선공 스님의 말씀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자기를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왜 힘든 것입니까. 실직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니까 힘든 것 아닌가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스님의 말에 사람들은 들릴듯 말듯 긴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 19일 강원도 영월 법흥사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린 '제1차 실직가장을 위한 템플스테이'는 이렇듯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한국경제신문 후원으로 법흥사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40세 이상 실직 가장 20여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첫날 법흥사 총무국장인 선공 스님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구조조정으로 빌딩관리직을 그만둔 신명호씨(54)는 "갑작스러운 실직이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며 "꿈은커녕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스님의 조언이 이어졌다. "지금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 상황 자체를 그냥 받아들여야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둘째날 오전 9시,인근 산에 올랐다. 아홉 개의 봉우리가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구봉대산.오랜만에 하는 등산에 봉우리를 오르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거친 숨소리를 토해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꼭 우리네 인생살이 같지 않습니까. " 참가자들을 인솔하는 묘향 스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3시간 만에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큰 목소리로 자기 마음 속 각오를 쏟아냈다. "꼭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여보 사랑해" "나는 할 수 있다. "
일과가 끝난 뒤 참가자들만의 시간.첫날의 서먹함과 어두운 표정은 이미 사라졌다. "노래해! 노래해!"를 외치는 사람들은 마치 대학 MT를 온 듯했다.
각자의 간단한 자기 소개와 장기자랑이 이어진 뒤 참가자들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건축회사를 다녔던 김지한씨(가명)는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게 싫다"며 "실직이라는 말도 뭔가 잃어버렸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어 듣기 좋지 않다"고 말했다.
개점 휴업인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정한씨(47)는 "작년 추석 이후 계속되는 불황속에 실직 아닌 실직상태여서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며 "명상을 통해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마지막 날인 21일에는 각자의 꿈을 담은 꿈주머니를 벽에 거는 시간이 주어졌다. 증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최근 해고된 정준섭씨(40)는 "'포기하지 말자'라고 적으려다 그냥 '행복하자'라고 적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걸 인정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는데 이 에너지로 새 직장을 반드시 구하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한경은 법흥사와 함께 4월16~18일 25세 이상 청년구직자 50명을,5월8~10일 아픔을 극복하고자 하는 10가족을 위한 템플스테이도 준비 중이다. 참가비는 없다.
영월=이재철 기자 eesang6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