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다롄시에 위치한 LED전구 제조업체인 중국관영전자.이 회사의 올해 사업계획에 담긴 키워드는 한국이다. LED(발광다이오드) 등을 제조해 중국 내수시장에 팔고 일본에도 수출하던 이 회사는 지난 1월 말 한국에서 열린 '바이 코리아(Buy Korea)' 행사에 참가한 뒤 사업계획을 급히 수정했다. 다롄공장의 생산물량을 줄이는 대신 한국에서 물건을 들여다가 중국시장은 물론 일본에도 판매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 주에 한국업체들과 두 번째 상담을 벌일 정도로 구매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다롄에서 만드는 것보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게 더 쌀뿐 아니라 제품의 성능도 뛰어나다"며 "가격과 기술경쟁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중국 내수시장은 물론 일본에도 한국 제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올해 사업계획을 다시 짰다"고 말했다. 중국 회사지만 중국 내 생산을 줄이고 한국 제품을 수입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3국 간 무역에도 나서겠다는 얘기다.

한국의 셋톱박스 생산업체인 위더스 비전은 지난달 중국 선전에서 열린 IC전시회에 참가했다가 대박을 터뜨렸다. 중국 업체와 115만달러어치의 수출계약을 체결한 것.중국의 셋톱박스 시장은 가격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중국시장에 물건을 판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환율 급등으로 가격경쟁력이 생기면서 국내 업체로는 처음으로 수출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중국에서 한국산 제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품질 좋고 비싼 제품이었지만 이젠 포인트가 변했다. '품질도,가격도 탁월한 제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윤석민 KOTRA 다롄무역관 과장은 "환율이 급등한 작년 하반기부터 중국 업체들로부터 수입 상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최근 들어서는 한국에서 10만위안어치가 넘는 옷가지 등을 사와 중국에 파는 '역(逆) 보따리상'도 생겼다"고 밝혔다.

중국시장에서 선전하는 것은 환율 덕을 보는 수출상품뿐만이 아니다. 중국 현지에서 생산,중국 내수시장에서 중국 회사뿐 아니라 글로벌 업체들과 동시에 전투를 치르고 있는 가전이나 자동차업체들도 예상 외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게 휴대폰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경제위기의 쓰나미가 몰아치기 시작한 뒤에도 시장점유율을 계속 높여가고 있다. 삼성의 지난 1월 중국 휴대폰시장 점유율(수량 기준)은 21.6%.경제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인 작년 7월 19.0%에 비해 오히려 상승 추세다. LG는 1월에 60%의 판매신장률을 보였으며 1분기 매출이 10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면 버드 등 로컬업체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중이다. 농민이 제품을 살 때 정부가 13%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가전하향(家電下鄕)정책이 올해 초 본격 시행되면서 광대한 유통망을 가진 로컬업체들이 '안방 프리미엄'을 누릴 것이라던 예상은 오답(誤答)이 되고 있다.

삼성과 LG의 분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독기 경영'의 산물이다. 박근희 중국삼성 사장은 새해 첫날인 지난 1월1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백발을 검은색으로 바꿨다. 20년 넘게 고집해왔던 흰머리를 흑발로 바꾼 건 '철저히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직원들에게 던지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대목인 연말 경기마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기회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생각속에 변화라는 화두를 떠올렸다"고 그는 말했다.

중국삼성전자는 프리미엄 브랜드만 고집하던 전략을 수정,시장 상황에 맞게 중 · 저가 제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전선을 확대하는 변신을 택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프리미엄제품을 구매하던 소비자 일부가 중가제품을 구매하는 등 시장구조가 달라지고 있고,이런 환경 변화에 정면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라고 중국삼성 관계자는 설명했다.

프리미엄 시장의 글로벌 업체와는 물론 중 · 저가 시장의 로컬 업체들과도 치열한 경쟁구도를 형성하며 총력전에 돌입한 것.이 같은 변신은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베이징의 번화가인 왕푸징에 위치한 동팡광창에서 휴대폰 판매점을 경영하는 당칭원씨는 "삼성의 애니콜은 자동차로 치면 벤츠 같은 브랜드인데 애니콜 상표가 붙은 중 · 저가 제품이 많아지면서 가격과 브랜드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올 들어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 지방의 중소도시로 판매거점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만큼 고객을 찾아 발로 뛰는 현장마케팅에 가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LG전자 중국법인은 더욱 공격적이다. 마케팅 비용,신제품 수와 유통망을 각각 작년 대비 두 배 늘리는 '트리플 더블(triple double)' 전략을 세웠다. 이미 TV 광고와 판촉활동을 강화했다. 우남균 LG전자 중국법인사장은 "작년 7000여개였던 휴대폰 유통망을 연말까지 1만3000개 수준으로 늘리고 신제품 수도 작년 20여개에서 60여개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판매대수를 100%가량 늘려 시장점유율을 2%대에서 5%대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현대자동차는 중국시장에서 군계일학 같은 존재다. 베이징현대의 위에둥(아반떼급 승용차)은 없어서 못 판다. 공장을 하루 22시간 가동해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라인이 돌아가지만 수요를 못 쫓아간다. 중국의 로컬 업체들이 판매 부진에 못 이겨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베이징의 기업컨설팅업체 건홍리서치의 모영주 사장은 "시장의 거품이 빠지면서 제품의 질과 가격을 함께 따지는 합리적 소비가 늘고 있다"며 "품질과 가격에서 두루 경쟁력을 갖춘 한국상품이 파고들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베이징=조주현 특파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