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기자가 찾은 인천 송도국제신도시 테크노파크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업체 대화연료펌프의 창고에는 차량 엔진용 필터를 담은 상자 더미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불황으로 안 팔린 '재고'가 아니라 곧 선적돼 전 세계로 팔려나갈 '수출품'들이다.

이 회사는 작년 1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부품전시회에서 뜻밖의 큰 성과를 거뒀다. 중국산만 수입해온 미국 대형 부품 유통업체 ID USA가 200만달러어치를 주문해온 것이다. 원 · 달러 환율이 상승하면서 개당 1달러20센트였던 대화의 필터 가격이 중국산과 맞먹는 1달러로 낮아지자 거래선의 30%를 대화로 돌린 것.ID USA는 대화의 생산 능력이 작아 원하는 물량 1200만개를 다 발주하지 못하고 300만개로 줄였다.

윤명한 대화 해외마케팅 부장은 "환율 영향으로 중국산과 한국산 부품의 가격 차가 6대 10에서 8대 10으로 좁혀졌다"며 "많은 부품업체들이 불황과 자동차 감산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회사 생산량은 작년보다 20% 늘었다"고 밝혔다. 일부 라인에선 주 · 야간 맞교대와 24시간 완전 가동을 해야 할 정도로 일감이 밀려있다. 올 여름엔 공장을 증설할 생각이다. 유동욱 회장은 "환율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수출 드라이브 전략을 통해 작년보다 50억원 많은 350억원의 매출이 가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항공기 부품의 수출길도 넓어지고 있다. 항공기 날개 부분에 쓰이는 탄소섬유 복합체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데크.경남 창원에 있는 이 회사는 지난해 12월 국내 유일의 항공기 제작업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공동 마케팅을 펼쳐 브라질 항공기 제작사 엠브라에르로부터 1억8000만달러어치의 계약을 따냈다. KAI가 엠브라에르와 제품 공급 계약을 맺고 생산물량을 데크에 이전한 뒤 데크가 항공기용 복합체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데크는 이 계약으로 그동안의 물량 부족 현상을 한번에 해소하면서 안정적 경영 기반까지 마련했다.

경남 사천에 있는 항공기 부품 제조업체인 부성정공은 1990년 설립 이후 KAI의 주요 협력업체로 자리잡았다. 보잉에 아파치 헬기 부품을 공급하는 등 굵직한 계약을 잇달아 수주하며 대표적 중소 항공 부품업체로 떠올랐다. 경남 창원 및 사천 일대에는 데크 부성정공 대화항공산업 율곡 남양정밀 포렉스 흥진항공산업 부경 등 헬리콥터 및 항공기 부품을 생산하는 쟁쟁한 중소기업들이 30여개 이상 모여 있다. 이들 기업은 한국형 헬기개발사업(KHP) 등을 통해 확보한 제품 개발 역량을 활용,보잉 에어버스 등 세계 유수 항공업체에 부품을 공급하거나 새 거래선 개척에 나섰다.

이달 초에는 보잉사가 부품 구매프로그램 및 희망 품목에 대한 설명회까지 한국에서 가졌을 정도로 국내 중소 부품업체들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경호 KAI 차장은 "보잉 등 세계적 항공기 제작업체들이 한국 항공기 부품산업의 기초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특히 유공압부품,기체부품,항공전자 부품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전했다.

엔고로 비상이 걸린 일본 기업들의 방한 행렬은 끝이 없다. 지난 25일 서울 양재동 KOTRA 본사에선 미쓰비시전기 시바우라MT 파로마 등 일본 5개 기업의 부품 구매담당자와 50여 국내 부품사 관계자들이 마주 앉았다. 연매출 3조8000억엔,종업원 10만명 규모의 미쓰비시전기에서는 나고야 나가사키 시즈오카 등 일본 6개지역 공장 조달부장들이 총출동했다. 미쓰비시전기 트레이딩의 미야자키 구매담당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작년 4분기부터 엔고 · 원저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품질력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한국산 부품 조달을 검토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 달 16일에는 36개 일본 기업들이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리는 한 · 일부품소재조달공급전시회에 참석해 한국산 부품 구매에 나선다. 해외 바이어들이 주도적으로 구매희망 부품목록을 제시하는 국내 첫 '역(逆)견본 전시회'다. 김태호 KOTRA 부품소재산업팀장은"엔고와 불황 속에서 한국산 부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여업체는 2배,상담규모는 3배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좀처럼 거래 업체를 바꾸지 않는 유럽 기업들도 한국산 부품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폭스바겐은 작년 하반기 한국에 부품 구매 사무소를 열고 본격적인 부품 소싱을 시작했다. 이전까진 폭스바겐 일본 지사가 한국산 부품 구매를 맡았다. 메르세데스벤츠도 얼마 전 한국 지사에 부품 구매팀을 신설했다. BMW그룹의 헤르베르트 디이스 구매담당 총괄 사장은 이달 초 현대모비스 등 한국 부품업체를 방문,부품 조달을 타진했다.

남미 등 신흥시장에도 '깃발'이 하나 둘 꽂히고 있다. 차량용 부품을 생산하는 P사는 콜롬비아의 자동차 부품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었다. 콜롬비아의 경차와 승합차,택시 시장의 50% 이상을 현대 · 기아자동차와 GM대우 등이 차지하면서 한국산 부품에 대한 신뢰도가 덩달아 높아졌다. 중동 지역에선 정부 주도로 품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부품 단속 바람이 불자 한국산 부품이 수혜를 보고 있다. 차량용 고무를 생산하는 국내 자동차 부품사 D사는 이란 · 이라크 수출이 올 들어 100% 급증했다.

가격과 품질 경쟁력을 모두 갖춘 한국산 부품이 전 세계 시장으로 팔려 나가면서 부품 · 소재 부문 무역수지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 2월에는 부품 · 소재 무역수지 흑자규모가 32억9100만달러로 다시 늘었다.

하지만 대부분 부품 수출이 기술보다는 반짝 환율효과에 힘입은 가격경쟁력에 기대고 있는 점은 한계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종환 자동차부품산업진흥재단 연구위원은 "역(逆)샌드위치 효과로 시동을 건 부품 수출이 '날개'를 달려면 부품업체들이 지속적인 기술 개발을 통해 범용부품보다는 핵심부품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도=김미희 기자/사천=장창민 기자 iciic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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