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에서 롱런 중인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김종욱 찾기'에는 2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배우는 단 3명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김종욱 찾기'는 7년 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와 그녀의 첫사랑을 찾아주려는 남자의 티격태격 로맨스를 다뤘다. 두 주인공이 첫사랑을 찾아다니는 과정에는 아버지,점쟁이,승무원,역무원,택시기사,다방 아가씨,바텐더,사기꾼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역할을 나머지 한 명의 배우가 소화한다. 그래서 이름도 '멀티맨'이다.

2년 반 동안 공연이 이어지면서 여러 명의 '멀티맨'들이 거쳐갔다. 그중 배우 조휘씨(29 · 사진)는 최근 가장 각광받는 뮤지컬 배우다. '멀티맨'에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는 얼마 전 출연한 뮤지컬 '돈 주앙'에서 '돈 카를로스' 역을 맡아 주연보다 더 주목받는 조연으로 떠올랐다. 뛰어난 노래 실력과 연기력을 인정받은 것.조씨를 직접 뽑은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에 따르면 그가 오디션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떠나자마자 숨죽이고 있던 면접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지난 2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가 건넨 명함 앞면에는 이름과 전화번호,사진이 있고 뒷면에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들이 적혀 있다.

그는 "직장인 친구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명함을 건네는 것을 보고 뮤지컬 배우도 예술인인 동시에 전문직인 만큼 명함을 갖고 다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조휘라는 이름도 자신이 직접 지은 가명이다. 한글 이름을 아버지에게 알려드리자 나라를 빛내는 배우가 되라는 뜻의 한자를 찾아주셨다고 한다.

▼뮤지컬 배우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고등학교 때 교회 연극반에서 활동하면서 배우를 꿈꿨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접어둔 채 체육교육과에 진학했고,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연극 동아리를 찾아갔어요. 입학도 하기 전에 연극 활동부터 시작했죠.그러다 대학 2학년 때 아는 분의 소개로 뮤지컬 '블루 사이공' 오디션을 봤습니다. 뜻밖에 덜컥 합격해 국립극장 무대에 섰어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요. 데뷔는 남들보다 쉬웠지만 '블루 사이공' 이후에는 이렇다 할 배역을 맡지 못했거든요. 배우가 됐지만 배우라 불릴 수 없는 처지였죠.요즘 말로 전 '중고 신인'이에요. "

▼음악과 연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습니까.


"음악은 따로 배우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음악실기 시간에 노래를 부르니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독일로 성악 공부하러 가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란 적은 있죠.'블루 사이공'에 합격한 것도 아마 노래 실력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연기와 춤 실력에서 벽에 부딪쳤어요. 오디션에 나갈 때마다 떨어졌죠.지금까지 떨어진 오디션만 300개가 넘을 걸요. "

▼'멀티맨'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하므로 연기력이 필수인데 어떻게 합격했습니까.


"수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지면서 칼을 갈기 시작했어요. 세 끼를 모두 삼각김밥으로 때우면서 돈을 모아 연기학원과 무용학원에 다녔습니다. 오디션을 볼 때는 연습곡을 1000번 이상 들었을 거예요. 그러다 2008년 뮤지컬 '씨 왓 아이 워너 씨'의 오디션을 보면서 뮤지컬 제작사 해븐의 박용호 대표 눈에 들었고,그 분의 추천으로 '멀티맨'을 맡게 됐죠.사실 '돈 주앙' 오디션에서도 3차에서 떨어졌는데 추가 오디션 제의를 받고 목숨 걸고 준비했어요. 제안받은 역할은 '라파엘'이었지만 작품에 나오는 남자 배역의 노래를 모두 외워 갔죠.결국 '라파엘'이 아닌 '돈 카를로스' 역을 따냈어요. "

▼최근 들어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데,오디션에 관한 충고를 해주신다면요?


"남자 배우들은 오디션에 와서 거의 80%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불러요. 그런데 이 노래는 조승우씨의 대표곡입니다. 저는 조승우씨만큼 잘할 자신이 없으면 부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만큼 연습을 철저히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죠.가사의 의미를 스스로 음미하면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배역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거죠."

▼예술은 천부적인 재능이 중요한 분야라고 알고 있습니다. 노력만으로 그렇게 주목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배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봐요. 제가 그렇거든요. 저는 작품을 시작할 때 노트를 한 권씩 만들어요. 첫장에는 작품과 역할에 임하는 자세를 써요. 그런 다음 연습과 공연할 때마다 한 장씩 써 나가요. 잘한 것과 잘못한 것,고쳐야 할 것 등을 메모하죠.저만의 교과서라고나 할까요? 한번 한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 하다 보면 점차 실력이 쌓여가는 거죠."

▼멀티맨으로서 22개 역할을 한꺼번에 소화하려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공연이 시작되면 5분마다 한 번씩 분장실로 들어와야 합니다. 10초 만에 옷을 갈아입어야 하죠.가발,소품,신발 모두 착오가 없어야 해요. 그래서 남녀 주인공은 직접 옷을 갈아입지만 멀티맨에게는 가발,소품,의상을 전담하는 4명이 따라붙어요. 물론 멀티맨은 단추 대신 '찍찍이'가 붙어 있는 특수 의상을 입죠.워낙 맡은 인물들이 다양하다 보니 처음엔 대사를 외우기도 힘들었어요. 5가지 다른 발성으로 연기를 해야 했고,순서도 뒤죽박죽이기 십상이었거든요. 요즘에는 요령이 생겼지만 처음엔 실수도 많이 했어요. 옷을 다 입지도 못한 채 무대로 뛰어나가는 일도 종종 있었거든요. 관객들이 오히려 그런 부분을 즐거워해 다행이었죠.요즘은 요령이 생겨서 입혀주는 옷에 맞춰서 대사를 외워요. 그러면 착오가 없더라고요. "

▼'멀티맨'과 '돈 카를로스' 모두 조연인데 어린 나이도 아닌 뮤지컬 배우로서 다급한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현재 제 좌우명은 '내가 돋보이려고 하지는 말자'예요. 극을 연결해 주면서 주인공을 받쳐주고 싶습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아무리 혼자 연기를 잘해도 작품이 보이지 않으면 그 인물도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배우라고 하면 혼자만 잘하면 된다고 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뮤지컬도 일반 회사와 똑같아요. 팀워크가 중요하거든요. 연출가 입장에서도 자신과 호흡이 잘맞는 배우가 좋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사사건건 부딪치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겠죠.배우는 일하고 싶어도 무대가 없으면 안 돼요. 그런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력뿐 아니라 공동작업에 적합한 사회성도 있어야 합니다. 연출가뿐 아니라 무대감독,안무,동료 배우들과의 호흡이 중요하거든요. '돈 주앙'에서도 양주인 음악감독의 도움이 컸어요. 그 분의 조언을 100%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제 노래 실력이 더 돋보일 수 있었죠."

▼데뷔했을 때와 지금 뮤지컬 배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요?


"처음엔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뮤지컬에 대한 개념 자체도 없었는데 말이죠.요즘은 노래의 중심에 연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뮤지컬은 노래로 연기하는 무대니까요. 감정이 살아있지 않으면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전달이 안 돼죠.조승우씨가 주목받은 것도 노래 실력에 더해 그만의 색깔과 감정을 음악에 담았기 때문이죠."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7월에 충무아트홀에서 '돈 주앙'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요. 10월에는 안중근을 소재로 한 뮤지컬 '영웅'의 조역 '조도선'을 맡아 LG아트센터 무대에 설 예정이고요. 그 밖에도 배역이 5개 들어와 있어요. 정말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

박신영/양윤모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