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흥망의 '다윈코드'] (6) 오로지 '몸집'만 키운다고?…박테리아의 생존술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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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A, 그 욕망의 덫
기업 진화는 박테리아처럼
환경 변화에 적응해가는 과정
무리하게 진행한 M&A는
결국 시장의 경고에 봉착한다
기업 진화는 박테리아처럼
환경 변화에 적응해가는 과정
무리하게 진행한 M&A는
결국 시장의 경고에 봉착한다
생명의 진화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 사다리 그림을 떠올린다. 사다리 바닥 부분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같은 단순하고 하등한 생명체가 놓인다. 위로 올라갈수록 군체생물,물고기,동물 등으로 점점 몸집이 커지고 지능이 높아진다. 사다리의 정점에는 망설임 없이 '만물의 영장' 인간을 세워 놓는다. 생명이 하등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가장 고등한 형태인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믿음에서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진리라고 보기 어렵다.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명의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진화는 생명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과정이며,그 중 복잡하고 몸집이 커지는 쪽으로 일어난 변이가 우리 눈에 잘 띄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마치 인간이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사실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생명체는 지구를 덮고 있는 박테리아가 아닐까.
# 진화냐 퇴화냐
이런 관점에서 기업 생태계를 살펴보자.적극적인 M&A(인수 · 합병)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가 된 GE나 한국에서 업계 1위 품목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이 기업 진화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그렇다고 믿어왔다. 기업의 진화를 박테리아처럼 환경 변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아닌 인간처럼 몸집이 크고 복잡한 존재로 '진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고,그래서 M&A를 통해 더 크고 더 많은 지식역량을 가진 기업이 되는 일에 온통 관심을 집중해왔다.
레미콘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유진그룹의 유경선 회장은 2006년 가을 하이마트 주식 100%를 보유한 유럽계 펀드 어피니티 파트너스가 하이마트 인수를 제안해오자 즉각 검토를 시작했다. 늘 1등 기업을 흠모해오던 유 회장에게 전자 유통업계 '넘버1'인 하이마트를 사들일 기회가 온 것이다. 유진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GS그룹을 제치고 결국 하이마트를 손에 넣는다. 그렇게도 원했던 1등 기업을 인수하고 재계 30위권에 진입했지만 유진에 돌아온 건 '유동성 위기'에 대한 시장의 경고뿐 이었다.
유진이 하이마트 인수에 투입한 돈은 1조9500억원.그 중 자기 돈은 불과 6000억원.나머지 1조1000억원은 농협,신한은행 등에서 빌렸고 3000억원 정도는 전환사채로 충당했다. 유진의 단기차입금은 2007년 990억원에서 지난해 4248억원으로 급증했다. 현재 유진은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 Deal Heat
비슷한 시기에 M&A에 열을 올린 사람은 유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2006년 6월9일 금호아시아나그룹 신문로 사옥 18층 박삼구 회장 집무실로 눈을 돌려보자.그날은 대우건설의 입찰 제안서 마감일.사무실엔 박 회장과 오남수 그룹 전략경영본부 사장,신훈 금호건설 사장 등 그룹 수뇌부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백지가 한 장씩 놓였다. 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얼마를 써내야 할지 각자 적어보게." 잠시 후 박 회장이 숫자가 적힌 종이들을 모았다. 가격을 훑어본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가격을 써내려갔다. '주당 2만7270원,총액 6조6700억원.'
소식을 들은 임원들은 술렁거렸다.
참모들이 써낸 가격보다 훨씬 높을 뿐 아니라 시장 전망치(3조원)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비쌌다. 대우건설의 전날 종가는 1만2600원.경영권 프리미엄이 100%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비싼 가격을 우려하던 분위기는 다음날 180도 바뀌었다. 경쟁 상대방인 두산이 주당 3만2400원을 써낸 것.당시 M&A 시장이 얼마나 과열(Deal Heat)됐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아무튼 채권단 지분의 50%+1주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두산과 달리 금호아시아나는 72% 전체를 인수하겠다고 약속,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지금 금호는 우여곡절 끝에 대규모 자산매각등을 통해 한숨을 돌린 상태다.
2007년 미국 소형 중장비업체인 밥캣을 49억달러에 인수한 뒤 갑자기 불어닥친 글로벌 경기침체로 자금 사정이 악화된 두산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두산은 인수 직후부터 한동안 심각한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려야했다. 이랜드도 유통업계 강자로 부상하기 위해 홈에버를 인수했다가 눈물을 머금고 재매각했다.
환경변화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다고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지진 때 살아 남은 동물,화산 폭발 후에도 생명을 이어가는 생물들은 따로 있다. 예기치 못한 변화는 M&A 전략의 최대 걸림돌이자 딜레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명의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진화는 생명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과정이며,그 중 복잡하고 몸집이 커지는 쪽으로 일어난 변이가 우리 눈에 잘 띄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마치 인간이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사실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생명체는 지구를 덮고 있는 박테리아가 아닐까.
# 진화냐 퇴화냐
이런 관점에서 기업 생태계를 살펴보자.적극적인 M&A(인수 · 합병)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가 된 GE나 한국에서 업계 1위 품목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이 기업 진화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그렇다고 믿어왔다. 기업의 진화를 박테리아처럼 환경 변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아닌 인간처럼 몸집이 크고 복잡한 존재로 '진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고,그래서 M&A를 통해 더 크고 더 많은 지식역량을 가진 기업이 되는 일에 온통 관심을 집중해왔다.
레미콘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유진그룹의 유경선 회장은 2006년 가을 하이마트 주식 100%를 보유한 유럽계 펀드 어피니티 파트너스가 하이마트 인수를 제안해오자 즉각 검토를 시작했다. 늘 1등 기업을 흠모해오던 유 회장에게 전자 유통업계 '넘버1'인 하이마트를 사들일 기회가 온 것이다. 유진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GS그룹을 제치고 결국 하이마트를 손에 넣는다. 그렇게도 원했던 1등 기업을 인수하고 재계 30위권에 진입했지만 유진에 돌아온 건 '유동성 위기'에 대한 시장의 경고뿐 이었다.
유진이 하이마트 인수에 투입한 돈은 1조9500억원.그 중 자기 돈은 불과 6000억원.나머지 1조1000억원은 농협,신한은행 등에서 빌렸고 3000억원 정도는 전환사채로 충당했다. 유진의 단기차입금은 2007년 990억원에서 지난해 4248억원으로 급증했다. 현재 유진은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 Deal Heat
비슷한 시기에 M&A에 열을 올린 사람은 유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2006년 6월9일 금호아시아나그룹 신문로 사옥 18층 박삼구 회장 집무실로 눈을 돌려보자.그날은 대우건설의 입찰 제안서 마감일.사무실엔 박 회장과 오남수 그룹 전략경영본부 사장,신훈 금호건설 사장 등 그룹 수뇌부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백지가 한 장씩 놓였다. 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얼마를 써내야 할지 각자 적어보게." 잠시 후 박 회장이 숫자가 적힌 종이들을 모았다. 가격을 훑어본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가격을 써내려갔다. '주당 2만7270원,총액 6조6700억원.'
소식을 들은 임원들은 술렁거렸다.
참모들이 써낸 가격보다 훨씬 높을 뿐 아니라 시장 전망치(3조원)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비쌌다. 대우건설의 전날 종가는 1만2600원.경영권 프리미엄이 100%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비싼 가격을 우려하던 분위기는 다음날 180도 바뀌었다. 경쟁 상대방인 두산이 주당 3만2400원을 써낸 것.당시 M&A 시장이 얼마나 과열(Deal Heat)됐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아무튼 채권단 지분의 50%+1주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두산과 달리 금호아시아나는 72% 전체를 인수하겠다고 약속,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지금 금호는 우여곡절 끝에 대규모 자산매각등을 통해 한숨을 돌린 상태다.
2007년 미국 소형 중장비업체인 밥캣을 49억달러에 인수한 뒤 갑자기 불어닥친 글로벌 경기침체로 자금 사정이 악화된 두산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두산은 인수 직후부터 한동안 심각한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려야했다. 이랜드도 유통업계 강자로 부상하기 위해 홈에버를 인수했다가 눈물을 머금고 재매각했다.
환경변화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다고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지진 때 살아 남은 동물,화산 폭발 후에도 생명을 이어가는 생물들은 따로 있다. 예기치 못한 변화는 M&A 전략의 최대 걸림돌이자 딜레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