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풀계의 이단아' 강 차장은 훗날 매출액 30조원이 넘는 대기업을 일궈낸다. STX그룹 강덕수 회장의 옛 호칭이 바로 '강 차장'이다.
STX는 적극적인 기업 인수 · 합병(M&A)으로 사세를 키운 국내 대표적인 그룹이다. 주력 계열사인 STX팬오션(옛 범양상선) STX조선해양(옛 대동조선) STX유럽(옛 아커야즈) 등이 모두 M&A를 통한 성과물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풀을 뜯어 연명하는 '초식동물'이 아니라 한 방에 먹잇감의 숨통을 끊는 '육식동물'의 성향이 강하다. '강 차장'의 꼼꼼한 준비성과 과감한 결단력이 그룹 전반에 녹아 있는 셈이다.
유럽 최대 조선회사인 아커야즈의 임시 주주총회를 앞두고 최대 주주인 STX그룹과 2대 주주인 하버야드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작년 3월.STX그룹은 재작년 10월 아커야즈 지분 39.2%를 사들이며 최대주주에 올랐지만 유럽연합(EU)의 반독점 심사에 걸려 정상적인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허점을 노린 하버야드는 이사회 개편 등의 안건을 들고 임시 주총을 요구했다. STX그룹의 손발이 묶인 틈을 타 경영권을 장악하겠다는 것.
STX그룹은 즉각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대신 하버야드 몰래 EU로부터 '디로게이션(derogation)' 승인을 받은 다음 극비리에 우호 세력을 규합했다. '디로게이션'은 경영상의 큰 변동이 예상될 경우 일시 정지된 주주권한을 한시적으로 되살리는 조항.결정적인 '한 방'은 뒤춤에 숨기고 겉으로는 임시주총의 표 대결을 포기한 듯한 인상을 풍겼다.
STX는 임시 주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디로게이션 승인 사실을 공시했다. 뒤통수를 맞은 하버야드는 우왕좌왕했고 임시 주총 안건은 표 대결 끝에 폐지됐다. 아커야즈가 STX의 품에 안착하는 순간이었다.
STX그룹은 여러 전투를 통해 승부의 관건은 '스피드'라는 것도 숙지했다. 순식간에 인수팀이 꾸려지고 공격 전략이 수립됐다. 기업을 인수한 뒤 몸을 추스르는 과정도 빨랐다. 사냥 후 행동이 굼뜨면 기껏 잡아 놓은 먹잇감을 하이에나에게 뺏기기 마련이다. 대동조선 범양상선 등을 인수한 뒤 1~2년 안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한 것도 이런 포식자의 기본 수칙에 충실한 덕이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