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처럼 보이지 않죠?"

이상종 대표는 자신을 '숫기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천성적으로 남에게 상처가 될 말이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말수도 적다는 것.말보다도 글이 좋았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백일장을 휩쓸었던 문학가 지망생이었다.

"고등학생 때 내내 책을 끼고 살았어요. 사업가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이 길로 들어설 줄 누가 알았겠어요. "

하지만 주변에선 그의 뭉근한 리더십에 신뢰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직원들은 그를 사장님보다 '오빠'나 '형' 등으로 부르길 좋아한다. 그 역시 직원 생일은 물론이고 연애문제 같은 신변 대소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1주일에 2~3회씩 술자리를 겸한 회식을 즐기다 보니 자연스레 나타난 결과다. 신기하게도 '가부'(可否)가 분명한 것만큼은 '성격이 물렀던' 선친과 달랐다.

"1984년에 입사는 했지만 고시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가려 했어요. 아버지가 1년만,1년만 하시는 바람에 한 해 두 해 일을 돕다가 여기까지 온 거죠."

대리로 회사에 처음 들어온 그는 인부들과 섞여 공장 청소는 물론 쇳물 붓는 일까지 두루 섭렵했다. 가고자 했던 길이 아니다 보니 곡절이 많았다. 석탄을 때서 쇠를 녹이던 당시 그는 실수로 쇳물을 발등에 떨어뜨려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회사 자금담당이었던 1980년대 중반에는 어음을 멋모르고 발행했다가 한꺼번에 만기가 돌아오는 바람에 부도를 낼 뻔했다.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 기술개발이었다. "숫기도,영업기술도 없었던 처지라 제가 승부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이 대표는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아버지 때보다 두 배 이상 연구개발비를 늘렸다. 현재 매출기여도가 높은 제품 대부분이 그의 취임 이후 만들어진 것들이다.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직원에게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도 도입했다.

그렇지만 신제품 개발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숙제다. 맨홀 뚜껑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승부하겠다는 것이그의 복안이다. 고객 주문에 맞춰 어떤 물건이라도 제작해주는 노하우를 갖춰야만 생명력이 오래간다는 판단에서다.

"100년 역사를 가진 일본 주물업체가 최근 부도가 났어요. 3대째 대를 이어왔던 회사였는데 다품종 소량생산을 요구하는 시대변화를 꿰뚫지 못했던 겁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죠.앞으로도 다른 일엔 한눈을 팔지 않을 작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