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과잉 유동성 논란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밝힌 것은 논란 자체가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1990년대 중반 침체의 와중에서 반짝 회복세를 보이자 1997년 소비세를 인상했는데 이후 다시 침체에 빠져 장기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를 한국이 범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경기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해 푼 돈이 일시적으로 자산가격을 밀어올리는 것은 당연한데 이 때문에 자금을 회수한다면 경제 전반이 장기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유동성 상황 어떻기에

과잉 유동성 논란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6일 국회에 출석해 "시중에 풀려 있는 800조원은 분명 과잉 유동성"이라고 말한 데서 촉발됐다. 800조원은 자산운용사 머니마켓펀드(MMF) 123조원,은행의 수시입출금식 예금 192조원,은행의 실세요구불예금 67조원,은행의 시장성예금 120조원,증권사 고객예탁금 13조원,정기예금 가운데 1년 안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부동자금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은 관계자는 "윤 장관은 시중 단기부동자금을 실물로 끌어들이는 방안에 대해 설명하면서 부동자금이 많다는 것을 쉽게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것을 시중 자금이 넘쳐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유동성의 과잉 여부는 통화량과 화폐유통속도 등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한은이 시중에 직접 공급하는 본원통화(평잔기준)의 경우 지난 2월 현재 63조원으로 1년 전에 비해 20%가량 늘었다.

한은은 지난해 9월 이후 본원통화를 10조원가량 공급했다. 하지만 본원통화의 증가율에 비해 광의통화(M2)의 증가율은 현저히 낮다. 현금통화, 결제성예금, 2년 미만 금융상품 등의 합계인 M2의 증가율은 지난 2월 11.4%다. 지난해 5월 15.8% 이후 계속해서 내리막이다.

여기에다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지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지표상으로도 유동성 과잉 국면으로 볼 수 없다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최근 자산가격 상승은 반등 성격

물가상승률과 자산가격 상승률 등으로 유동성 과잉 국면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도 있다. 한은은 지난해 9월부터 돈을 풀었는데 물가상승률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리먼 사태가 터진 지난해 9월 5.1%에서 지난달 3.9%로 둔화됐다.

주가와 부동산이 상승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코스피지수는 10월27일 장중 892까지 내려갔다가 21일 현재 1312까지 올랐다. 저점 대비 상승률은 47%에 이른다. 하지만 2100에 육박했던 2007년 11월 초에 비하면 여전히 40% 가까이 낮아져 있는 상태다. 부동산가격도 서울 강남의 일부 재건축 아파트가 최근 30%가량 올랐지만 나머지는 큰 움직임이 없다. 2007년의 고점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크게 낮아진 상태다. 윤 장관도 21일 국회에서 "아직 유동성 증대에 따른 버블(거품)단계까지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발언의 수위를 낮췄다.

◆"유동성 환수 없다"

한은 관계자는 "외국도 자금을 대거 풀고 일부 자산가격이 오르고 있지만 과잉 유동성을 얘기하지는 않는다"며 "상황이 급변해 경제가 급속 호전되거나 과열로 바뀌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당장 인플레 우려가 없고 기업 등 실물에선 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인 만큼 한은이 일부 자산가격 상승에 자극받아 통화량을 흡수해선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금융통화위원은 "과잉 유동성 상태라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통화를 흡수해야 하는데 요즘처럼 경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

◆ 유동성(liquidity)이란

경제원론에선 어떤 자산을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얼마나 쉽게 바꿀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쓰인다. 화폐가 일반적인 교환의 매개수단이어서 유동성이 가장 높은 자산이다. 주식이나 채권도 쉽게 현금화할 수 있어 유동성이 비교적 높다. 주택이나 미술품은 유동성이 낮다. 최근 거론되는 '과잉유동성'에서 유동성은 현금화가 쉬운지보다는 돈이 얼마나 많이 풀려 있는지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금융,실물 등 전 분야에서 돈이 과도한 상태를 과잉유동성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