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억년 전에 탄생한 우주는 무수한 항성의 탄생과 죽음을 통해 장대한 물질 진화를 이룩했다. 그 결과가 태양계의 한 혹성인 지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또다시 수십억 년의 진화 프로세스를 통해 인간을 낳았고,그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 낸 것이 현대 문명이다. 문명은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감히 그 종착역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경영이라는 행위는 현대 사회가 낳은 진화의 최첨단에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잡하게 변화해 나가는 환경에서 새로운 변이를 창출하고,세상의 온갖 네트워크에서 정보와 지식과 영감을 모으고 축적한다. 관계의 복합체를 의미하는 네트워크는 언제나 인간 사회가 움직여 온 공간이었으며 하부 관계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무너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진화를 거듭해 왔다.

# 자연계 vs 경제계

따지고 보면 자연계 생물의 세계 역시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구성돼 있다. 분자들은 세포에서 상호작용하고 세포들은 유기체에서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유기체들은 생태계에서 상호작용한다.

경제계 역시 네트워크에 의존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도로 하수도 광케이블 통신망 전파 철로 가스파이프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업들은 이 공간에서 소비자 정부 경쟁기업 등과 상호작용하고 개별 시장들은 전체 지구촌 시장에서 상호작용한다.

생물 세계처럼 경제 세계의 네트워크들도 중층적으로 배열돼 있다. 자동차 산업만 보더라도 그 주변을 차지하고 있는 산업 네트워크에는 철강 석유 호텔 패스트푸드 등이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현대 기업 간 경쟁은 네트워크 쟁탈전이다. 동시에 새로운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자가 새로운 부가가치를 획득하고 시장의 패권을 장악한다.

# 인간 vs 회충

네트워크의 가치는 생물학에서도 그대로 입증된다. 인간 게놈은 유전자로 구성된 거대하고 복잡한 화학적 네트워크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출범하기 전에 과학자들은 인간 게놈이 약 10만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막상 연구가 완성됐을 때 인간의 유전자 숫자는 3만개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3만개라는 절대적인 숫자에 놀란 게 아니라,인간보다 훨씬 하등 생물인 회충과의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회충의 유전자 숫자는 인간의 3분의 2 수준인 1만9000개였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와 선충류의 격차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이 바로 네트워크다. 2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네트워크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생물의 종류는 2의 제곱,4다. 같은 방식으로 유전자가 3개라면 8,4개라면 16이다. 만약 100개라면 무려 5억6800만개다.

인간이 회충보다 유전자 숫자가 1만개 많다는 것은 거의 슈퍼 컴퓨터로도 계산이 안 되는 복잡성을 인간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에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 18만명 vs10명

이 같은 논리를 우리 주변의 커피숍과 한국 최고의 기업 삼성에도 그대로 대입해 볼 수 있다. 통상 큰 커피숍에서 일하는 직원의 숫자는 10명 정도.반면 삼성의 임직원 숫자는 18만명이다. 숫자로 보면 삼성의 직원은 커피숍의 1만8000배에 달하지만 네트워크의 복잡성은 그보다 엄청난 차이가 난다.

또 삼성의 조직 규모는 내재적으로 미래 혁신을 위한 더 많은 기회와 공간을 갖고 있다. 동원 가능한 네트워크,확장 및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많다는 것은 삼성이 조그만 구석의 커피숍보다 훨씬 뛰어난 생존술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 논리대로라면 작은 조직은 큰 조직을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큰 조직에는 복잡성의 '불행'이 있다. 과거 로마나 몽골 제국이 끝내 망한 것이나 거대 기업들이 멸망하는 것 역시 스스로 얽어놓은 네트워크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실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관료주의다.

어떤 정부나 기업도 관료주의를 일부러 설계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번번이 조직의 관료화를 막지못하고 작지만 유연하며 민첩한 조직에 추격을 허용한다.

# 복잡성 vs 관료주의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조직의 확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역할의 배분과 조직 간 장막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품 설계를 하는 사람은 엔지니어링 기술에만 집착하고,마케팅을 하는 사람은 시장 소비자들에게만 관심을 쏟을 경우 그 회사는 기술과 시장을 제대로 연결시킬 수가 없다.

"거대한 조직일수록 점진주의에 중독되기 쉬우며 점진주의는 혁신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이라는 얘기는 경직되기 쉬운 복잡성의 함정을 정면으로 꼬집은 것이다. 겉으로는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좀 더 나아가려고 할 때 보수적으로 돌아서고 마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영국의 미용사 비달 사순은 정밀한 커트를 개발해 직모 여성들을 파마로부터 해방시킨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뉴욕에서 영업하려면 파마 기술을 테스트하는 면허 시험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한때 뉴욕 진출을 포기했었다. 뉴욕시 당국의 네트워크가 자기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저지른 잘못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