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미국의 통신사 AT&T에 근무하던 한 통계학자가 회사에 보고서 한 장을 올렸다. 당시 늘어나는 전화 통화량과 미국 인구 증가율 전망에 대한 것이었다. 이 학자는 이를 토대로 1925년이 되면 미국의 모든 여성이 전화교환원으로 근무해야 폭증하는 전화 수요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AT&T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즉각 자동 전화교환기 개발에 나섰고,2년 만에 자동화 설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AT&T는 이를 발판으로 미국 통신시장을 석권했다.

1931년 5월13일은 프록터 앤드 갬블(P&G)에 기념비적인 날이다. 닐 매켈로이라는 신입사원이 한 장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사내 금기를 깨고 무려(?) 석 장짜리 보고서를 올렸던 것.요지는 상품별로 독자적인 마케팅 팀을 운영하자는 내용이었다. 요즘 경영기법으로 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전사 차원의 제품 마케팅 외에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던 당시로선 꽤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신입사원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P&G는 미국 전역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확고한 브랜드 파워를 확립했다. 요즘 LG전자 같은 국내 대기업들이 마케팅부문 영입 1순위로 P&G 출신을 꼽는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 네트워크는 끊임없이 변한다

특정 개인의 생각이나 구상이 조직에 채택되고 그것이 사회와 경제의 흐름을 바꾸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 아이디어가 만개할 수 있는 주변 여건이 성숙해 있어야 한다. 내적으로 기업을 혁신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하고 외부 시장환경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AT&T는 전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P&G의 혁신은 포드로부터 촉발된 사업부별 마케팅 제도의 위력이 경영일선에 공감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창발적인 아이디어는 네트워크의 자율적인 자기조직화를 통해 네트워크 내에 축적된 정보와 지식,상상력을 흡수하며 확장된다. 그 결말이 기존 네트워크의 질적 전환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새로운 생각,새로운 시도의 출발은 언제나 개인의 몫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주변 네트워크와의 접목과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단 한 번의 시도로 대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또한 우리 인생은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해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불운에 시달릴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 속의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속에 수많은 기회와 가치가 살아서 숨쉬고 있다. 영원한 네트워크는 없다. 진화를 거듭하면서 기존 네트워크의 그물이 찢겨져 나갈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 네트워크가 변하는 이유는 네트워크 내에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시세에 불멸의 고정가격이 없는 이유도 불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격이라는 '카테고리'는 항상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된 상태로 있다.

#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

불균형의 틈새를 파고드는 것은 언제나 개체다. 개체의 집합체인 조직이 의기투합해서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틈새를 포착하고 새로운 질서를 디자인하는 출발점은 조직이 아니다. 조선시대 장영실은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핍박을 받았지만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청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뤘다. 신분제라는,당시로선 감당하기 힘들었던 네트워크의 지배를 받았겠지만 홀로 떨치고 일어섰다.

5만원권 지폐의 모델(?)로 등장한 신사임당 역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라는 경직된 사회구조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게다. 그녀라고 현실의 높은 장벽을 피할 수 있는 비법을 갖고 있었을 리가 없다. 토머스 에디슨은 고작 3개월의 초등학교 경력과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불세출의 발명왕이 됐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우편 배달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석유재벌 존 록펠러는 시골의 엉터리 약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산업사에 한 획을 그었다.

생물학자들은 진화 생태계에도 핵심종이 존재한다고 한다. 임의로 어떤 종들을 제거할 경우 먹이사슬과 경쟁구도가 급변해 생태계 전체의 구도를 바꾸는 종들이다. 원시생물인 아메바가 대표적이다. 이 종은 다양한 곤충들과 연충들의 먹이 원천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다양한 새들과 포유동물의 먹이가 되고,새와 포유동물은 여러 식물의 종들에 영향을 미친다. 아메바는 비록 힘없는 하등생물로 진화했지만 상위의 먹이사슬을 떠받치는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편과 특수를 혼동할 수는 없다. 특별한 개인이나 개체의 사례를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주 속에 하나의 먼지에 불과한 우리 모두는 누구나 외롭고 힘없는 존재로 출발한다. 때로는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단단한 네트워크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중요한 포인트는 누군가는 고독한 객체로서의 삶을 떨쳐내고 네트워크의 주체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건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찰스 다윈이 태고의 섬인 갈라파고스를 떠돌며 전달했던 메시지는 '진화는 디자이너 없는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러분이 그 디자이너를 자처하고 나서야 한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