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런던 극장 문화가 되살아나고 책으로 남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차츰 응접실과 교실까지 보급되면서 그는 세계적인 대문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미국 럿거스대학 영문학 교수인 잭 린치는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추수밭 펴냄)에서 셰익스피어는 그의 천재성이 아니라 사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문화영웅'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다뤄지면서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천재로 인정을 받았고,1800년 무렵에는 반신(半神)의 지위까지 올랐다"면서 "이는 세상의 가장 위대한 문학 천재가 자기편에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한 수많은 정치가와 극작가,배우,편집자,학자,비평가,교사들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지난주 미국 연방대법원의 존 폴 스티븐스(89) 대법관이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셰익스피어는 없고 그의 작품은 17대 옥스퍼드 백작인 에드워드 드 비어(1550~1604)가 쓴 것"이라고 주장한 것과 상통합니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생애 기록이 불분명하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친필 원고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작품의 진위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공동 창작이 흔한 일이어서 그가 남긴 희곡들 역시 개인의 창작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학계 의견도 많습니다.
린치 교수의 분석이 맞다면 셰익스피어는 사후 7년 만에 대문호로 '데뷔'했습니다. 극단의 친구들이 셰익스피어의 남은 희곡을 모아 책으로 출간한 《첫 번째 2절판(First Folio)》 덕분이지요.
구텐베르크의 성서 다음으로 유명한 이 책은 사라질 뻔한 셰익스피어의 통속적인 이야깃거리를 오래 살아남게 한 '효자'였다는데,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화부 차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