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당론을 정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소관 상임위원회인 기획재정위원회에서 통과를 시도하자 당 지도부가 "땜질식 개정은 안 된다"며 부랴부랴 수습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설마 통과되겠느냐"며 사태를 방관했던 정부도 느닷없이 태스크포스(TF)를 구성,체계적인 논의를 하자며 뒷북 대응에 나서고 있다. 국회에서도 여야 구분 없이 기재위와 정무위가 한은법 개정을 놓고 충돌하는 황당한 일이 이어지고 있다.

◆느닷없는 금융정책 · 감독시스템 개편 논의

지난 17일 정부와 여당은 고위 당 · 정 · 청 회의를 열고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금융감독원 등으로 분산돼 혼선을 빚고 있는 금융 정책 및 감독 조직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 위한 TF를 구성하기로 했다. 지금처럼 국제 금융과 국내 금융 정책이 재정부와 금융위로 분산돼 있고,환율 관리와 금리 정책도 재정부와 한국은행으로 분리된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위기 대응이 어렵다는 게 이날 회의의 결론이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아직 금융위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급하게 금융정책과 감독시스템의 개편 논의를 하자는 것은 전쟁 중에 군 지휘라인을 바꾸자는 얘기와 같다"며 시기상조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회가 한은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려고 하자 당황한 당 · 정이 급조된 방안을 들고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금융위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TF 논의가 시작될 경우 금융당국의 말이 시장에서 제대로 먹혀들겠느냐"고 우려했다.

◆계속되는 당 · 정 라인의 엇박자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여당 지도부와 정부의 안일한 문제인식과 함께 소통의 부재를 꼽고 있다.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는 지난 21일 기획재정위 소위가 한은법 개정안을 의결한 데 대해 "벌어져서는 안 될 '사고'가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당론을 정하기는커녕 사태를 수수방관하면서 당 지도부가 안이하게 대처해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재정부와 금융위도 "현 단계에서 한은법 개정을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을 뿐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과 대처방안 마련에 소홀하면서 사태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폐지를 둘러싼 당 · 정 간 엇박자에 이어 한은법 개정안을 둘러싼 여당 지도부와 정부의 뒷북 대응으로 당 · 정의 리더십에 심각한 문제점이 노출됐다며 우려하는 분위기다.

정부 일각에서조차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건 '금융위 모델'이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라며 또다시 정부 조직을 뜯어고치는 데 따른 혼선을 감안할 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밑에서는 기관 간 밥그릇 싸움

금융위와 한은 내부에서는 일단 TF가 본격 가동에 들어갈 경우 결국 기관 간의 밥그릇 싸움이 재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태희 정책위 의장이 "지금 한은법만 일부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100년을 내다보는 금융정책 및 감독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명분일 뿐 실상은 한은과 금융위,재정부의 권한다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위 내부에서는 재정부의 국제 금융 및 환율 정책 부분까지 흡수,금융정책과 감독기능을 모두 갖는 금융부 또는 금융청 형태로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면 재정부는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금융정책과 감독기능을 모두 갖는 부서는 없다면서 재정부가 다시 금융위를 흡수하고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등 금융통화 정책기능에도 관여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기능 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은은 이 경우 재정부가 너무 비대해져 옛 '모피아'(권한이 막강한 재정부를 마피아에 빗댄 표현)로 돌아간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반면 재정부와 금융위는 한은의 기능에 '물가 안정' 이외에 '금융 안정'을 추가하고 금융회사에 대한 직접 조사권을 주는 방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정책과 감독체계 개편 논의는 부처와 기관별 힘겨루기로 이어지면서 갈등만 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심기/정종태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