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건 사회건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 자체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숙도가 결정된다. 시험낙방은 개인으로서 불행이지만,그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재기의 계기도 되고,구제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시험에 떨어진 것을 자신의 실력부족으로 생각하고 실력쌓기에 전념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겠지만,시험실패를 자신을 뒷바라지하지 못한 부모의 탓으로 돌릴 때 전도는 암담하다.

지금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권력형 비리문제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는 참담한 일이지만 그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부패없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고 '백년하청(百年河淸)'의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측근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생계형 범죄'라느니 '정치보복'이라느니 하는 소리 말이다. 그것도 일반사람이 아니라 한때나마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들로부터 나온 이야기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노 정권 사람들에겐 못된 버릇이 있었다. 항상 비교를 엉뚱한 데 한다는 점이다. 과거 전두환 · 노태우 정권이나 한나라당 '차떼기'시절과 비교하면서 10분의 1 정도밖에 비리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사회의 서민들이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아는가. 선거 때 우연히 밥을 얻어먹어도 100배나 되는 벌금을 물어내야 하기 때문에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런데도 권력형 비리를 '생계형 범죄'라고 한다면,'생계형 범죄'를 규정하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사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한 일은 로맨스고 남이 한 일은 불륜이라는 것일까. 정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우리 탓'이라고 하며 국민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도리인데,어떻게 이런 생뚱맞은 '역발상'을 한다는 말인가.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하기를 강요했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항상 깨끗하다고 하던 권력자들의 위선과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는데,그걸 생계형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한 '지록위마'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생계를 힘겹게 꾸려가면서도 정직하게 살아온 서민에 대한 모욕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정론(正論)'을 잃어버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누구편이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없어졌다. 폭력이면 그 자체로 나쁜 것인데도 국회에서조차 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또 성폭력 미수사건도 중대한 범죄인데,이것을 비판하면 상대방에게 이익을 주니까 침묵하거나 감추자는 태도가 성행한다. 이번 '생계형 범죄론'도 그런 것이다. 권력형 비리는 그 자체로 '공공의 적'인데 평소에 얼마나 깨끗했으면 그런 비리를 저질렀겠느냐는,소피스트들조차 머리를 흔들 만한 괴변이 나오는 판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래서는 안 된다.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아군과 적군의 개념만 판쳐서는 한국사회의 미래가 암담하다. 권력형 비리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기보다 '주군으로 모신 사람'이라고 하여 되는 말,안 되는 말을 섞어가며 강변하는 모습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

권력은 가도 진실은 남는 법인데,한때 권력과 인연이 있다고 해서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한 나라에 정론이 없고 누구편이냐에 따른 중구난방(衆口難防)만 있으면 어떻게 반듯한 나라가 되겠는가. 권력형 비리 그 자체보다 그 비리를 미사여구로 감싸는 사람들이 더 위험한 '공공의 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