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덫에 걸린 집단지성

애초부터 집단지성은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지성(知性, intellect)이란 말의 연원은 중세나 17∼18세기의 서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이전까지 모든 것을 감정이나 순간에 직감적(直覺的)으로 통찰하는 신탁을 빌미로 하는 종교적 무한 직감이 대세였다. 이에 반발하여 생긴 말이 지성이다. 인간의 자유를 부르짖은 르네상스 물결은 사물을 개념(槪念)에 의하여 사고하거나 또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판정하는 오성적(悟性的)인 능력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 '지성(知性)', '지성인'이란 말이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지성의 한계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보이는 것만으로 한정한다는 점. 이미 검증된, 경험에 의해 통찰된 지식을 현재와 미래의 판단 근거로 삼는 다는 점.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서로 굳건하게 밀착되어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넘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긴밀한 관계를 증명한 것이 양자역학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세계의 추는 눈에 띄게 보이지 않는 세계 쪽으로 기울고 있다.

성공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다. 성공한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 경향을 극대화하다보면 성공의 관성에 빠져 안주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성공의 추억에 근거를 둔 ‘지성’의 맹점은 다가오는 불확실한 미래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지성의 한계다.

그렇다면 집단지성은 개인지성의 이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지금 보면 AT&T, 애플사, IBM가 한물간 기업으로 외면당하고 있지만, 당대에는 두말할 것 없는 최고 엘리트들의 집단지성이었다.
가령, IBM의 경우, 9개 연구소에 3,000여 명의 박사급 연구원을 보유하며, 8년 연속 미국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특허등록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연구원들 가운데에서 5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명실 공히 당대 집단지성의 결정체였다. 그토록 엘리트로 구성된 집단지성이 왜 15년도 못 버티고 허무하게 좌초하고 말았을까.

각 기업들이 쇠락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흥했던 이유와 같다. 바로 ‘리더의 선택’의 실패다. 즉, 초기 IBM이 선택한 CEO 리더는 AT&T의 노동집약인 발상에서 탈피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에는 빌게이츠가 동업을 제안했으나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MS같은 소프트웨어 발상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IBM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이다.

언뜻 보면 책임의 화살을 집단지성이 아닌 리더에 겨냥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의 흥망을 전적으로 리더 CEO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일다. 그런 CEO를 선택하고 맡긴 집단지성에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 집단지성이 왜 실패할 CEO를 택했는가하는 책임.

개인지성을 능가하는 집단지성이라 할지라도 개인지성이 보이는 한계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신봉한다는 취약점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지성의 잣대로만 리더를 선출하다보니, 발전 영역을 보이는 세계로 한정하고 마는 것이다.

이외에도 집단지성의 약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만만치 않다. 모종의 의도에 이용당해 객관적 정보를 균형 있게 섭취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검증되지 않고 인터넷에 떠도는 지식정보를 근거로 전체 공동체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거나, 악의적인 안티 마녀사냥으로 일개인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이 그 치명적 약점이다. 이처럼 집단지성은 보이는 세계로 한정된 범위에서 구상한 ‘획일적 평등과 정의’란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획일적 평등과 정의는 보이는 정보만으론 분명히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5. 영적 직관력(spiritual providence)’을 갖춘 자를 찾아라

집단지성의 한계를 다른 말로하면 ‘믿어서 알지 못하고, 아는 것만 믿는 다는 것’이다. 그 대안은 지성 밖에서 찾아야한다. ‘알아서 믿지 않고, 믿어서 아는’ 리더를 옹립해야한다. 그 리더란 ‘영적 직관력(spiritual providence)’을 갖춘 자를 말한다.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우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현상계 너머 현상을 좌우하는 불가사의한 세계를 직감할 수 있는 능력이 영적 직관력이다. 영적 직관력을 갖춘 자를 다른 말로 ‘지혜로운 자[현자]’라 할 수 있다. 영적 직관력은 과거의 지식과 정보, 공부를 열심히 해서는 습득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1998년 겨울이 다가오자 매스컴에서는 그해 겨울은 기록적인 한파가 닥칠 것이라고 떠들썩하게 경보했다. 그 예측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11월 중순 경 수능 날, 수은계는 한 없이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기상관측 전문가들은 ‘라니냐’ 현상과 결부해 과학적 해석을 곁들였고, 겨울 내내 혹독한 추위가 맹위를 떨칠 것이라고 호언했다. 시중에선 난방기구와 방한복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당시 지방의 한 농부는 내게 이런 말을 전해왔다.
“글쎄요. 올 겨울은 별로 추울 것 같지 않은데....”
일개의 촌부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김장 무가 위로 떴거든요. 뿌리가 깊이 박히면 그해 겨울은 춥고, 얕게 박히면 춥지 않아요.”
1998년 겨울 날씨는 모든 관측기상자의 예상을 무참히 짓밟았다. 농부의 말대로 평년보다 상당히 높은 기온이 내내 이어졌다. 보이는 지식정보로 중무장한 집단지성이 보이지 않는 지혜를 갖춘 일개 농부에 완패한 것이다. 알아서 믿지 않고, 믿어서 안 촌부에게 말이다.

과연 집단지성 구성원 중에서 현장 농부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이가 있었을까. IBM도 그랬다. 초기에 빌게이츠가 IBM 관계자 앞에서 사업구상을 프레젠테이션 했을 때, IBM경영진도 콧방귀를 뀌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 장담할 것인가.

지식, 관찰력, 통찰력은 이미 직간접적인 경험과 검증을 통한 이미 지난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엔 무용지물이다. 지성은 보이는 세계만 보지만, 지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한다. 집단지성은 절실하게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자’를 필요로 한다.

영적 직관력은 지식과 달리 영구적인 게 아니다. 처음엔 아무리 뛰어난 영적 직관력자라 할지라도 성공에 도취해 안주하면 그 직관력은 무뎌지고 만다. 애플이나 IBM의 창시자 또한 처음엔 뛰어난 영적 직관력을 지녔지만, 크고 작은 성공과정에서 안주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계속 성공하겠지 하는 오류. 그래서 영적 직관력은 끊임없는 노력을 전제로 한다. 집단지성의 구성원들은 리더가 영적 직관력을 계속 발현하는지 언제든 알아볼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한다. 결국 집단지성의 구성원 중에 영적 직관력을 갖춘 자가 많아야한다.

집단지성의 고질적 약점에 대한 보완책이 아니더라도 영적 직관력의 유용성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다. 미래 산업은 보이는 산업에서 보이지 않는 산업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1인 1국가란 말도 철 지난 말이 되었다. 인간은 1인 1우주다. 우주의 비밀이 인간의 비밀이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이 비밀을 풀기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질주하고 있다.

집단지성이 가야할 길은 분명해 보인다. 보이는 지식정보의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지혜의 세계로 무한 확장될 것임을 비춰본다면, 집단지성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판단하는 구성원 개개인 지혜의 역량에 달려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판단하는 리더와 그 리더를 선택하는 능력에 집단의 운명이 결정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은 자칫 유럽 중세시대의 폐해를 재연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이성을 미혹하게 만드는 사이비 직관과 맹목적 직관을 판치게 할 위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험은 영적 직관력을 알아보는 집단지성 구성원 각자의 역량에 맞길 수밖에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거대한 도전이기도 하다.(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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