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지난달 30일 빚이 많은 45개 대기업 그룹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방안을 발표하자 시장에선 '늦은 게 아닌가'하는 반응이 나왔다. 연말 연초 경제위기가 몰아치면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은 계열사 매각과 감원 등을 추진했지만 우리만 '함께 가자'며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에 치중,구조조정의 때를 놓쳤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런 비판 속에 김종창 금감원장이 채찍을 들고 나섰다. 시장에선 "언제는 기업을 최대한 살려라"고 주문하더니 "이제는 거꾸로 간다"며 컨트롤타워의 혼선을 비판,김 원장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주가는 오르고 부동산 경기도 회복조짐을 보이는 데다 고환율(원화가치 하락) 효과로 기업들도 구조조정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경기가 좋아진 게 아니다. 더 어려운 시기가 다가올지 모른다. 시장 지표들이 조금 나아진다는 전망으로 자칫 기업 구조조정이 소홀해질 우려가 있다. 미래를 바로 보고 뼈를 깎는 각오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

김 원장은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기 전날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이상완 삼성전자 사장,김종인 대림산업 사장,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 등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요 인사들을 만나 "선택과 집중을 하라.모든 기업을 들고 갈 수는 없지 않나"며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은행장도 압박했다. 주채권은행이 제대로 못하면 은행장을 문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0여년 전 외환위기 때 김 원장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국민생활국장이었다. 당시 원자재 수입을 위해 기업들이 신용장을 개설하려고 해도 대외신용도가 떨어져 외국계 은행들이 모두 기피하는 것을 지켜봤다. 1998년 4월에는 당시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던 금융감독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옮겨 일하면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지금 상황은 외환위기 때와 같이 역사에 기록될 시기다.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조선 자동차 등 현재의 주력 산업은 외환위기를 딛고 일어났다. 이 같은 산업이 또 나와야 한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주채권은행들은 이번 주부터 10여개 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기 위해 본격 협의에 들어간다. 또 부실 우려가 있는 400여개 대기업에 대한 신용위험 세부평가에도 착수한다. 건설이나 조선업 등 일부 업종에 그쳤던 구조조정이 우리 경제의 근간인 대기업으로 전면 확산되는 단계인 셈이다.

주채권은행들의 구조조정 작업을 '큰 칼을 옆에 차고' 주시하는 김 원장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