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이원희 대원학원 이사장, 댄스홀 될뻔했던 학교를 대한민국 No.1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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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재시대 내다본 '엘리트 사관학교장'
미국 뉴욕 타임스는 작년 4월27일자 1면 머리기사로 대원외고 얘기를 실었다. 미 명문 고교인 필립 엑스터의 대학수학능력시험(SAT) 평균점수가 2085점인데 대원외고는 2203점으로 월등히 높다는 게 골자였다.
대원외고는 이처럼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학교다. 작년 미 아이비 리그 소속 명문대학에 합격한 학생이 46명(미국 전체론 93명)에 달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국내 첫 외국어고인 대원외고가 문을 연 것은 1984년.그후 '경기고-서울대'라는 '명문 학벌 계보'를 '대원외고-해외 명문대'로 바꿔버렸다.
이원희 대원학원 이사장(75)은 이런 '대원외고 신화'를 일군 주인공이다. 대원외고 곳곳엔 그의 땀과 노력,혜안과 철학,집념과 결단이 배어 있다. 시대를 앞서나간 교육관과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낸 돌파력은 내로라하는 CEO(최고경영자)에 견줘도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원학원은 대원외고 외에도 대원고 대원여고 대원국제중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 기사가 나가면 나는 죽어.외고 설립은 무산되는 거라고."
1982년 이 이사장은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를 출입하던 한 기자에게 하소연했다. '세계화 교육'을 위한 첫 외고 설립 인가를 신청한 직후였다. 외고 설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추진했던 프로젝트.사전에 기사화되면 인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자는 집요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KBS와 동양방송에서 일한 언론계 선배라고도 설득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다음 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다. 그리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설립하지 마시오." 전두환 정권 시절,군인 교육비서관은 단칼에 그의 꿈을 깨뜨렸다.
인가가 무산되자 이규호 당시 문교부 장관이 그를 직접 불렀다. "이미 땅을 파고 공사를 다 하고 있는데 어쩌냐"며 하소연하자 이 전 장관은 "댄스홀이라도 만들든가 해야지,그것 참…"이라며 말을 흐렸다. 결국 그 땅에는 대원외고가 아니라 대원여고가 들어섰다.
이 이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해도 인가 신청서를 냈다. 마침내 청와대에서 '다른 외고도 같이 인가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대원외고는 1984년 개교할 수 있었다.
국제중학교 설립은 더 극적이다. 이 이사장이 대원중을 외국어교육에 특화한 국제중으로 운영하겠다고 신청한 것은 1991년.순조롭게 인가를 받았지만 이틀 만에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당시 서울시 교육감이 인가를 취소해버린 탓이다. 그리고 국제중의 꿈은 18년이 지난 올해 3월에야 실현됐다. 이 이사장은 "외고를 운영해 보니까 중학교 때부터 세계화된 교육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며 "반대 주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뛰어난 학생을 길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렬했다"고 회고했다.
◆공무원…언론인…그리고 교육 경영자
이 이사장의 귓불은 무척 크다. 크고 늘어져 마치 부처님 귀 같은 인상을 준다. 복 많은 귀 덕분일까. 그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운이 따라줬다. 추진력이 강한데 운도 있으니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력서는 한 페이지 빼곡하다. 읽다 보면 교육자답지 않게 속도감 넘치는 인생을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연세대 상경대를 나온 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문화공보부에서 근무하다 KBS 편성계장으로 가게 된다. 이후 문화방송(MBC) 편성과장을 거쳐 동양방송 라디오에서 방송부장,지금으로 치면 편성국장을 했다. 36세에 방송사 편성 최고책임자가 됐으니 엄청난 고속 승진이었다.
동양방송 TV사업본부장을 거쳐 38세엔 상무가 됐다. 이 이사장은 "외고를 설립한 것도 방송사에 있을 때 기자들이 영어를 못해 특파원 보낼 사람이 없는 현실이 답답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그가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동양방송과 같은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제일제당(CJ) 전무로 발령이 났던 1975년 무렵.충남 미산의 한 학교 교장이던 부친(고 이상구 선생)의 말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네가 대학을 갈 때는 농촌을 살리고 밥 굶는 사람 없게 한다고 하더니,지금은 그 꿈을 버렸느냐.좋은 사람,훌륭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도 그 꿈을 이루는 길이 된다. " 1977년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어 대원학원을 설립하게 된 계기였다.
◆품성 갖추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다
이 이사장은 '스카우트(SCOUT) 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현재는 명예 총재)를 지내기도 한 그는 "스카우트는 지식교육이 아니고 좋은 품성과 협동심,창의성을 길러주는 참 좋은 단체"라며 "결국은 휴머니티 문제고 인간이 틀리면 쓸 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매너 교육,리더십 교육을 강하게 시키고 싶은데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이 너무 촘촘히 짜여 있어 불만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70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력적이다. 깨알 같은 신문 글씨도 아무 문제 없이 읽는다. 건강 비결은 '3분법'.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은 휴식과 독서,3분의 1은 운동,3분의 1은 일을 한다. 운동으로는 걷기를 즐긴다. 밤 11시가 넘어서도 1시간~1시간30분씩 서울 양재천을 걷곤 한다. CBS의 클래식 음악방송도 즐겨 듣는다.
그는 앞으로도 대원학원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관심사는 해외에 '대원외고 브랜치(branch · 분교)'를 설립하는 일이다. 오는 9월엔 태국 방콕에 브롬스그로브라는 대원인터내셔널스쿨을 개교한다. 이 이사장은 "국제학교를 2~3개 정도 더 만들려고 한다"며 "기본 구상은 끝났고 올 여름께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움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정년이 없다는 걸 이 이사장은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대원외고는 이처럼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학교다. 작년 미 아이비 리그 소속 명문대학에 합격한 학생이 46명(미국 전체론 93명)에 달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국내 첫 외국어고인 대원외고가 문을 연 것은 1984년.그후 '경기고-서울대'라는 '명문 학벌 계보'를 '대원외고-해외 명문대'로 바꿔버렸다.
이원희 대원학원 이사장(75)은 이런 '대원외고 신화'를 일군 주인공이다. 대원외고 곳곳엔 그의 땀과 노력,혜안과 철학,집념과 결단이 배어 있다. 시대를 앞서나간 교육관과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낸 돌파력은 내로라하는 CEO(최고경영자)에 견줘도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원학원은 대원외고 외에도 대원고 대원여고 대원국제중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 기사가 나가면 나는 죽어.외고 설립은 무산되는 거라고."
1982년 이 이사장은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를 출입하던 한 기자에게 하소연했다. '세계화 교육'을 위한 첫 외고 설립 인가를 신청한 직후였다. 외고 설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추진했던 프로젝트.사전에 기사화되면 인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자는 집요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KBS와 동양방송에서 일한 언론계 선배라고도 설득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다음 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다. 그리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설립하지 마시오." 전두환 정권 시절,군인 교육비서관은 단칼에 그의 꿈을 깨뜨렸다.
인가가 무산되자 이규호 당시 문교부 장관이 그를 직접 불렀다. "이미 땅을 파고 공사를 다 하고 있는데 어쩌냐"며 하소연하자 이 전 장관은 "댄스홀이라도 만들든가 해야지,그것 참…"이라며 말을 흐렸다. 결국 그 땅에는 대원외고가 아니라 대원여고가 들어섰다.
이 이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해도 인가 신청서를 냈다. 마침내 청와대에서 '다른 외고도 같이 인가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대원외고는 1984년 개교할 수 있었다.
국제중학교 설립은 더 극적이다. 이 이사장이 대원중을 외국어교육에 특화한 국제중으로 운영하겠다고 신청한 것은 1991년.순조롭게 인가를 받았지만 이틀 만에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당시 서울시 교육감이 인가를 취소해버린 탓이다. 그리고 국제중의 꿈은 18년이 지난 올해 3월에야 실현됐다. 이 이사장은 "외고를 운영해 보니까 중학교 때부터 세계화된 교육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며 "반대 주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뛰어난 학생을 길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렬했다"고 회고했다.
◆공무원…언론인…그리고 교육 경영자
이 이사장의 귓불은 무척 크다. 크고 늘어져 마치 부처님 귀 같은 인상을 준다. 복 많은 귀 덕분일까. 그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운이 따라줬다. 추진력이 강한데 운도 있으니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력서는 한 페이지 빼곡하다. 읽다 보면 교육자답지 않게 속도감 넘치는 인생을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연세대 상경대를 나온 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문화공보부에서 근무하다 KBS 편성계장으로 가게 된다. 이후 문화방송(MBC) 편성과장을 거쳐 동양방송 라디오에서 방송부장,지금으로 치면 편성국장을 했다. 36세에 방송사 편성 최고책임자가 됐으니 엄청난 고속 승진이었다.
동양방송 TV사업본부장을 거쳐 38세엔 상무가 됐다. 이 이사장은 "외고를 설립한 것도 방송사에 있을 때 기자들이 영어를 못해 특파원 보낼 사람이 없는 현실이 답답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그가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동양방송과 같은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제일제당(CJ) 전무로 발령이 났던 1975년 무렵.충남 미산의 한 학교 교장이던 부친(고 이상구 선생)의 말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네가 대학을 갈 때는 농촌을 살리고 밥 굶는 사람 없게 한다고 하더니,지금은 그 꿈을 버렸느냐.좋은 사람,훌륭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도 그 꿈을 이루는 길이 된다. " 1977년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어 대원학원을 설립하게 된 계기였다.
◆품성 갖추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다
이 이사장은 '스카우트(SCOUT) 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현재는 명예 총재)를 지내기도 한 그는 "스카우트는 지식교육이 아니고 좋은 품성과 협동심,창의성을 길러주는 참 좋은 단체"라며 "결국은 휴머니티 문제고 인간이 틀리면 쓸 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매너 교육,리더십 교육을 강하게 시키고 싶은데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이 너무 촘촘히 짜여 있어 불만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70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력적이다. 깨알 같은 신문 글씨도 아무 문제 없이 읽는다. 건강 비결은 '3분법'.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은 휴식과 독서,3분의 1은 운동,3분의 1은 일을 한다. 운동으로는 걷기를 즐긴다. 밤 11시가 넘어서도 1시간~1시간30분씩 서울 양재천을 걷곤 한다. CBS의 클래식 음악방송도 즐겨 듣는다.
그는 앞으로도 대원학원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관심사는 해외에 '대원외고 브랜치(branch · 분교)'를 설립하는 일이다. 오는 9월엔 태국 방콕에 브롬스그로브라는 대원인터내셔널스쿨을 개교한다. 이 이사장은 "국제학교를 2~3개 정도 더 만들려고 한다"며 "기본 구상은 끝났고 올 여름께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움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정년이 없다는 걸 이 이사장은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