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을 빻고 또 빻는 일뿐이었어요 아침에 문밖에서 길어온 이미지를 불에 달군 쇠막대기처럼 망치로 종일 두드려요 저녁 무렵에야 뜨거워진 선에서 떨어져나온 쇳가루들이 캔버스에 점점이 흩어지지요 빛은 가루가 되어 다른 빛과 몸을 섞어요. '(<쇠라의 점묘화> 중)

시인 나희덕씨(43)가 5년 만에 발표한 신작 시집 《야생사과》(창비)에는 자신과 시를 빻아 부스러뜨리는 소리가 흥건하다.

나씨는 "제 시의 미덕으로 꼽혀왔던 인내하고 수용하고,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면서 "과거에는 형식적 완결성이나 구조적 안정감을 중시했다면,지금은 순간적 생동감에 몸을 맡기면서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전에는 완결할 수 있겠다는 요량이 서야 시를 썼어요. 경험이 정제될 때까지 기다렸지요. 그런데 이제는 제 말을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좀 거칠더라도 그 순간의 느낌이 살아나도록 놓아두게 됐습니다. 과거라면 손을 보았을 순간적 진술도 남겨두니 창작 방식이 좀 달라진 셈이죠."

이를 위해 나씨는 자신의 시를 비우는 방법을 택했다. 그 이유에 대해 "시는 비울수록 충일해진다"는 설명을 건넸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고 출렁대는데,제가 써온 시는 굳어있는 그릇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제 완강함을 쪼개고 나의 존재 자체를 지우다보면 다른 기미가 흘러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지우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반면,나 자신을 고집하면 나로만 남아있어야 하잖아요.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게 아니라,오히려 비울수록 풍부해지는 게 시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시란 여러 가지 기운이나 존재가 결합하는 공간으로 비워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그래서 나씨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당신 몸 속에 흘러들어/ 메뉴판 가득 적힌 당신을 주문하고/ 나를 후루룩 마셔버리고 싶어!/ 아니면 당신 입 속에 숨어/ 질기디질긴 나를 되새김질하거나/ 당신 눈 속에 스며/ 나를 스르륵 지워버리고 싶어!'라고 소리지른다. 그렇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중략) 나는 다른 심장들을 삼키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새는 날아가고> 중)라는 깨달음이 뒤따라온다.

비운다 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나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표제작 <야생사과>에서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어떤 영혼들은 야생사과를 따서 시인에게 건넨다. 야생사과는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하지만 자신을 비워서 열어젖힌 시인은 '개미들을 훑어내고' 낯선 이들이 건넨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베어문다. 그러자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고 깨닫게 된다.

나씨는 "달콤하고 균형잡힌 과수원 과일이 아닌,길들여지지 않은 맛을 내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미덕을 지니고 있는 야생사과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고 전했다.

이번 시집 표지에 등장하는 야생사과나무 사진도 그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