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만이 넘는 유대인,동성애자,장애인,소수 인종의 생명을 앗아간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가 남긴 아이러니는 그의 악행이 많은 역사학자들의 생계를 책임 진다는 것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 히틀러에 대한 학술 논문의 숫자는 12만부를 넘어섰고,밤낮으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편성하는 미국의 역사 전문 채널은 우스갯소리로 '히틀러 채널'로 불린 지 오래다. 도토리 키재기가 되겠으나 미국에서 영국사나 프랑스사를 연구하는 학자보다 독일 사학자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도 나름 히틀러와 나치 '덕택'이라 하겠다.

히틀러와 나치 연구를 통해 밥을 먹고 사는 역사학자들의 관심은 전후 60년이라는 세월의 변화만큼 바뀌어 왔다. 선대 역사가들이 파시즘 이론에 기반해서 나치와 재벌과의 관계,나치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려고 했다면,최근에는 '인종주의'를 단순히 파시스트 국가의 부산물이 아닌 나치 사회의 핵심으로 보는 이론과 나치의 특수성보다는 일상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치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가' 하는 단순한 질문은 비단 민주주의와 독재의 경계에 서 있는 국가의 역사가들뿐만 아니라,나름 성숙한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가의 역사가들까지 매혹시켜 온 변함 없이 중요한 주제다. 그도 그럴 것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지도자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지도자의 특성에 하나도 맞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방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는 1차 대전에 참전할 당시 '지도력 부재(!)' 라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유로 승진하지 못한 실패한 군인이었다. 유대인 대학살을 기획,실행한 친위대의 대장이었던 히믈러는 실패한 양계업자였으며,악마의 혀를 가진 괴벨스는 20대 청년실업의 표본이었다. 자칭타칭 나치 제국의 가장 섹시한 남자였던 공군 수장 괴링은 서커스의 곡예비행사였다.

이런 아마추어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서 만든 나치당은 1928년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2.8%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지만 1930년에는 18.3%,1932년에는 37%로 다수당이 됐다. 급기야 1933년 1월에는 히틀러가 제국의 수상에 오르면서 정권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총칼로 무장한 쿠데타가 아니라,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집권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어중이 떠중이'의 모임을 뽑아 주고 나라를 맡겼을까. 나치가 독일인들의 전 계층에서 고른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 최근의 견해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계층이 있으니 바로 지방의 중소 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들이었다. 이들 중산층은 1929년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인해 강한 심리적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수치를 보면,이들 계층이 받은 경제적인 타격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자신들도 언제든지 거리를 배회하는 실업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의식이었다.

나치는 바로 이 두려움을 토양으로 삼아 성장했다. 하루 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나치는 '모두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는 희망의 정당이었다.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지만 젊은 나치 당원들은 역동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럭을 타고 시골길을 달리면서 확성기를 통해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구호를 전파했다.

색색으로 단장된 화려한 깃발과 퍼레이드,그리고 당시 여전히 획기적인 매체였던 영화는 나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시골의 중산층들이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나치가 말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치는 동네에 문제를 일으키던 건달이나 사회불안 세력으로 낙인 찍힌 공산당원 등에게 선택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이 법과 질서의 수호자임을 자청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조금 과격하지만,뭔가를 해 낼 것 같은 착실한 독일 젊은이들.이게 바로 나치의 이미지였다.

물론 나치가 잘 만들어진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현실에 투사하는 능력만으로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독일 사회가 굳건한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면 나치가 주는 매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독일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실제로 초반에 급속히 상승하던 나치의 인기가 확고부동한 게 아니었다는 점은 1933년 1월 선거에서 나치가 32%를 득표,지지율 감소를 경험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치를 권력의 정점에 올려 놓았을까. 바로 대안 부재라는 독일 사회가 처한 서글픈 현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는 바이마르 헌법은 1차 대전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이라는,독일인들의 눈에 참으로 굴욕적인 사건들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례 대표제를 통해 몇 석 안 되는 의석을 차지한 군소 정당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신속한 정책 결정과 집행을 막아 '민주주의=비효율'이라는 오명을 남김으로써 나치 성장의 토양이 됐다.

비효율 · 무능력을 피해 나치의 품에 자신들을 의탁했던 독일 중산층들은 처음 몇 년간은 행복했던 것 같다. 전쟁 준비를 통해서 실업자들은 모두 일자리를 찾았고 공공 재정을 낭비하던 장애인이나 불치병 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12년 후 나치가 이루고자 했던 사회 혁명이 가져온 변화는 모든 것을 무너뜨린 파괴의 혁명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두는 민주주의 가치가 상실된 사회가 가는 길은 파멸의 길이라는 것.이것이 전례 없는 경제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주는 히틀러의 교훈이 아닐까.

김회은 < 텍사스A&M대 역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