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엄마딸' 들의 엄마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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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맹모(孟母)를 꼽아야 할 것이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孟母三遷)은 물론이고,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孟母斷機) 유명한 고사 덕분이다. 이는 훗날 조선의 명필을 키워 낸 한석봉 어머니의 일화로 변용되기도 했지만,과연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것은 《맹자》나 《사기》 <맹자순경열전> 등에 맹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반면, 비슷한 시기에 쓰인 설화집 《열녀전(列女傳)》에만 전하기 때문이다.
이 책 첫머리의 <훌륭한 어머니들(母儀傳)> 편은 맹모와 관련한 에피소드 두 가지를 더 전한다.
"맹자가 장가를 들었다. 안방에 들어서는데 부인이 웃옷을 걸치지 않은 것을 보고 불쾌해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부인은 '안방에서는 부부의 도마저 문제삼지 않는 법(夫婦之道,私室不與焉)인데,낭군이 저러는 것은 나를 손님 취급하는 것이니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맹모에게 하소연했다. 맹모가 아들을 불러 타일렀다.
'예에 따르면 마루에 오를 때 인기척을 내는 것은 안에 있는 사람에게 미리 알리기 위함이고,방에 들어설 때 눈길을 아래로 두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을 보게 될까 조심해서이다. 예를 잘 살피지 못한 것은 너인데,도리어 남의 비례를 탓하니 얼마나 잘못된 일이냐.' 맹자가 부인에게 사과했다. "
"하루는 맹자가 기둥을 안고 탄식하였다. 맹모가 이를 보고 까닭을 물었다.
'전날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더니 오늘은 탄식을 하니 어찌된 일이냐?'
'지금 이 나라엔 내가 배운 도가 쓰이지 않아 떠나고자 하나 어머니가 연로하시니 이 때문에 괴롭습니다. '
'걱정할 것 없다. 너는 이제 성인이 됐고 나는 늙었으니, 너는 너의 의를 행하고 나는 나의 예를 다하면 될 것이다(子行乎子義,吾行乎吾禮)'."
저자 유향은 찬하기를 "맹모는 자식 교육과 어머니의 도리, 시어머니의 도리를 알았고 부도(婦道)에도 밝았다"고 칭송하고 있지만, 위대한 정치 사상가에게서 다분히 마마 보이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중국 백화문학 혁명을 이끈 후스(胡適 · 1891~1962년)를 길러 낸 펑(馮) 부인은 대만 중학교과서에도 실린 대단한 어머니이다. 열일곱 나이에 일흔 한 살 노인의 넷째 부인으로 들어가 6년 만에 청상이 됐고, 전부인들과 그들 소생인 장성한 아들들 틈바구니에서 숨죽이고 살면서 외아들을 교육시켰다. 후스는 마흔 살 때 <내 어머니(我的母親)>라는 수필에서 펑 부인을 이렇게 기렸다.
"어머니는 내게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엄격한 아버지였다. 남 앞에서 나를 혼내거나 때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작은 잘못이 있으면 다음날 새벽 내가 잠이 깨길 기다려서 꾸짖으셨고, 저지른 잘못이 클 땐 밤이 깊어 조용해졌을 때 방문을 닫고 벌을 주거나 때리셨다. 나는 우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 어머니가 자식을 훈계하는 것이 남들에게 화풀이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의 엄한 스승(嚴師)이요 자애로운 어머니(慈母)는 나를 이렇게 가르치셨다. "
공교롭게 맹모나 펑 부인은 모두 홀어머니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후스의 동지였던 린위탕(林語堂 · 1895~1976년)은 "홀어머니는 독특한 현실 감각으로 자식 교육에 성공한 사례가 많다. 이렇게 본다면 아버지란 자식 교육에 관한 한 전혀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까"(《생활의 발견》)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장애와 암을 지고 살면서도 남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산 장영희 교수의 죽음이 감동을 주고 있다. 특히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이 '엄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요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엄마 신드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것을 주도하는 것이 아들이 아니고 '엄마딸'들임을 생각하면, 30여년간 어버이날에 더부살이해 온 아버지들이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
이 책 첫머리의 <훌륭한 어머니들(母儀傳)> 편은 맹모와 관련한 에피소드 두 가지를 더 전한다.
"맹자가 장가를 들었다. 안방에 들어서는데 부인이 웃옷을 걸치지 않은 것을 보고 불쾌해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부인은 '안방에서는 부부의 도마저 문제삼지 않는 법(夫婦之道,私室不與焉)인데,낭군이 저러는 것은 나를 손님 취급하는 것이니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맹모에게 하소연했다. 맹모가 아들을 불러 타일렀다.
'예에 따르면 마루에 오를 때 인기척을 내는 것은 안에 있는 사람에게 미리 알리기 위함이고,방에 들어설 때 눈길을 아래로 두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을 보게 될까 조심해서이다. 예를 잘 살피지 못한 것은 너인데,도리어 남의 비례를 탓하니 얼마나 잘못된 일이냐.' 맹자가 부인에게 사과했다. "
"하루는 맹자가 기둥을 안고 탄식하였다. 맹모가 이를 보고 까닭을 물었다.
'전날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더니 오늘은 탄식을 하니 어찌된 일이냐?'
'지금 이 나라엔 내가 배운 도가 쓰이지 않아 떠나고자 하나 어머니가 연로하시니 이 때문에 괴롭습니다. '
'걱정할 것 없다. 너는 이제 성인이 됐고 나는 늙었으니, 너는 너의 의를 행하고 나는 나의 예를 다하면 될 것이다(子行乎子義,吾行乎吾禮)'."
저자 유향은 찬하기를 "맹모는 자식 교육과 어머니의 도리, 시어머니의 도리를 알았고 부도(婦道)에도 밝았다"고 칭송하고 있지만, 위대한 정치 사상가에게서 다분히 마마 보이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중국 백화문학 혁명을 이끈 후스(胡適 · 1891~1962년)를 길러 낸 펑(馮) 부인은 대만 중학교과서에도 실린 대단한 어머니이다. 열일곱 나이에 일흔 한 살 노인의 넷째 부인으로 들어가 6년 만에 청상이 됐고, 전부인들과 그들 소생인 장성한 아들들 틈바구니에서 숨죽이고 살면서 외아들을 교육시켰다. 후스는 마흔 살 때 <내 어머니(我的母親)>라는 수필에서 펑 부인을 이렇게 기렸다.
"어머니는 내게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엄격한 아버지였다. 남 앞에서 나를 혼내거나 때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작은 잘못이 있으면 다음날 새벽 내가 잠이 깨길 기다려서 꾸짖으셨고, 저지른 잘못이 클 땐 밤이 깊어 조용해졌을 때 방문을 닫고 벌을 주거나 때리셨다. 나는 우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 어머니가 자식을 훈계하는 것이 남들에게 화풀이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의 엄한 스승(嚴師)이요 자애로운 어머니(慈母)는 나를 이렇게 가르치셨다. "
공교롭게 맹모나 펑 부인은 모두 홀어머니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후스의 동지였던 린위탕(林語堂 · 1895~1976년)은 "홀어머니는 독특한 현실 감각으로 자식 교육에 성공한 사례가 많다. 이렇게 본다면 아버지란 자식 교육에 관한 한 전혀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까"(《생활의 발견》)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장애와 암을 지고 살면서도 남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산 장영희 교수의 죽음이 감동을 주고 있다. 특히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이 '엄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요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엄마 신드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것을 주도하는 것이 아들이 아니고 '엄마딸'들임을 생각하면, 30여년간 어버이날에 더부살이해 온 아버지들이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