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사이드] 대기업 구조조정 줄다리기 ‥ 정부 "다 살리려다 다 죽어"
은행권 대출이 많은 45개 주채무계열(대기업그룹)에 대한 재무평가가 지난달 말 끝났다.

금융감독원은 불합격 판정을 받은 그룹 위주로 주채권은행이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더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해당 기업들의 반발에 밀려 구조조정 계획을 짜지 못하고 있다.

재무평가가 끝난 지 2주가 지났는데도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대상 기업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위기발생 '우려'로 구조조정 추진

지난해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던 주채무계열이 올 들어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기업 부실이 현실화될 수 있고,이로 인해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10여년 전의 외환위기와는 달리 기업들의 연쇄부도 사태가 당장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국내 경제도 흔들릴 수 있는 만큼 선제적으로 재무구조 개선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은행이 대기업에 구조조정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금융감독원의 은행감독업무 규정에 있다. 금융회사 신용공여 잔액이 전체의 0.1% 이상인 계열기업군을 선정(79조)하고 주채권은행은 담당 주채무계열의 여신상황을 포함한 기업정보를 종합적으로 관리(제82조)하도록 명시돼 있다.

또 '주채무계열 재무구조개선 운영준칙'에 따라 각 은행은 매년 4월 말까지 주채무계열에 대해 부채비율과 채무상환능력,수익성을 중심으로 재무평가를 실시한 뒤 불합격 계열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이행실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규정돼 있다.

지난달 말 재무평가에서 불합격판정을 받은 곳은 45개 주채무계열 중 14곳이다. 이 중 약정체결 대상으로 꼽히는 그룹은 금호 동부 한진 동양 애경 웅진 유진 대한전선 GM대우 등 10곳 안팎이다. 부채비율과 이자보상배율,총자산회전율,영업이익률 등 재무지표와 향후 현금흐름 등을 종합해서 평가한 결과다.


◆기업 "왜 하필 내가…"

하지만 해당 대기업들은 "왜 나를 구조조정 대상으로 낙인찍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아직 큰 문제가 없는데도 굳이 부실기업 딱지를 붙여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예컨대 금호아시아나의 경우 지난해 말 부채비율은 169%,웅진은 137%,한진 동양도 240%로 당장 위험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약정 체결대상으로 결정될 경우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그룹 전체의 신용도가 떨어지고 제2금융권의 자금회수를 부채질해 멀쩡한 기업도 쓰러질 수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기업들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자금조달 계획과 매각대상 자산 및 계열사를 확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매달 이행실적을 점검받아야 해 사실상 은행관리체제에 들어가게 되고 자율경영이 어려워진다.

약정에 따라 과거에 높은 가격을 주고 인수한 기업을 현재 시장가격에 따라 헐값에 내놔야 하는 점도 불만이다. 경기가 회복될 경우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기업을 헐값에 뺏기게 된다는 것이다.

금호 유진 대한전선 등 약정체결 대상기업 중 상당수가 과거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운 그룹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고민을 안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입장에서는 약정을 맺는 순간 과거 인수합병의 실패를 자인하게 되는 셈"이라며 "쉽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했다.


◆당국 "그룹 전체가 사라질 수 있다"

대기업의 버티기 전략에 금융당국은 '그룹 해체'까지 언급하며 경고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이날 "최근의 일부 긍정적인 신호를 낙관적으로 해석해 구조조정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며 "기업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니고 우리 경제가 향후 '죽느냐 사느냐' 문제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종창 금감원장도 전날 "모두 건지려고 하다가 전부를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아까운 기업부터 먼저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도 지난 9일 기자간담회를 자청,"시장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결국 시장의 응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한 발 더 나아가 "마취주사까지 맞은 기업들이 수술대에는 안 올라갈려고 한다"며 "구조조정을 소홀히 하려는 기업에 대해 은행들은 다양한 강요수단을 갖고 있다"고 회초리를 들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경우 신규 여신 중단은 물론 만기연장 거부,담보권 행사를 통한 여신회수 등의 제재조치를 가할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부채보다는 이익 위주 구조조정 필요

전문가들은 부채비율 위주로 기업들을 구조조정했던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지금은 현금흐름을 개선하고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 사업구조개편 방식의 구조조정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차입금이 다소 많더라도 금융비용을 상회할 정도의 이익이 나오고 향후 사업전망도 밝다면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공급과잉으로 시장과열이 우려되고 영업전망이 불투명한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사업비중을 축소하고 관련 기업을 매각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대표는 "부채비율 자체보다는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인 이자보상배율이 더 중요하다"며 "기업들이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경쟁력있는 사업구조를 갖출 수 있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입금 규모가 작더라도 우발성 채무로 인한 잠재적 부실 가능성이 큰 경우에는 선제적인 자산매각을 유도,상황 악화에 대비토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정부가 할 일은 재무적 구조조정보다 각 기업이 가진 사업구조를 한국 경제의 전체 틀 속에서 자발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사업구조가 방만한 기업들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심기/김현석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