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속을 걷다 보니 길가 웅덩이 여기저기 누런 먼지가 떠 있다. 또 뒷산의 손바닥만큼 자란 갈참나무 잎 가장자리에도 노란 얼룩이 붙어 있다. 때마침 황사(黃砂)가 시작됐다는 보도였다. 이런 노란 자국들이 황해를 건너온 황사의 흔적이라 지레 잘못 짐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꼭 568년 전 이때 일이 떠올랐다. 1441년 4월26일 《세종실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양력으로 치면 꼭 이때쯤의 일이다. 예조에서 그 전날 밤 황우(黃雨)가 내렸다는 보고를 올렸다. 마침 세종은 안질로 온양온천에 가 있던 때였다. 황우라면 누런 흙비가 내렸다는 뜻인데,이런 이상 현상은 재이(災異)로 여겨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마땅한 것이 당시의 사정이다. 그에 대한 마땅한 조치라면 임금은 조심하는 태도를 보이고,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마침 같은 때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이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전날 밤 '누런 비'가 내렸다는 바람에 안평대군은 궁궐 안 여기저기 물 웅덩이를 조사했더니 누런 비는 아니더라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조사 결과 그릇 속 빗물에서는 누런 흔적을 볼 수 없었으니,"황우가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땅에만 내려오고 그릇에는 내리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하고 안평대군은 반문하고 있다. 그는 또 누런 비가 고인 것을 보니 순황색은 아니었고,송홧가루가 섞인 듯해,물에다 송홧가루를 섞어 보니 두 가지가 색깔이나 맛이 똑같았다는 것이었다. 25일은 어두울 무렵 바람이 급해졌고,이경쯤부터 비도 내렸으니 떨어졌던 송홧가루가 빗물에 떠오른 것으로 판단된다는 보고였다.

세종은 당장 판단을 보류하고 환관 김충을 서울로 보내 상세한 조사를 했다. 4월29일 그의 귀환 보고를 듣고,안평대군이 보낸 건황설(乾黃屑 · 마른 누런 가루) 한 봉지를 실험해 본 결과 송홧가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튿날인 5월1일 임금은 최종 결정을 정부에 통고했다. 만일 그것이 하늘에서 내린 '누런 비'라면 어찌 그릇 속에는 누런 빗물을 볼 수 없겠느냐면서,송홧가루가 내린 비에 섞였을 뿐임을 증명한다고 판정한 것이다. 자연현상을 보이는 대로 인정하지 않고,비판적으로 관찰하고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실험을 반복하는 과학적 태도가 잘 나타난다.

특히 이 문제를 두고 승지들과 논의하다가 세종은 뜻밖의 사실도 밝힌다. 즉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비가 온 양을 잘 알 수 없었기에,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빗물이 괴인 푼수를 실험했는데…"(近年以來, 世子憂旱, 每當雨後, 入土分數, 掘地見之. 然未可的知分數, 故鑄銅爲器, 置於宮中, 以驗雨水盛器分數)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1441년 4월29일자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 측우기가 세종의 큰 아들의 발명으로 1441년 4월 이전에 이미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식으로 호조에서 측우기 제작을 건의한 사실은 넉 달 뒤인 8월18일자 《세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측우기의 발명자는 세종이 아니라 그 큰 아들 이향(李珦,1414~1452년년)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세자였던 그는 1450년 아버지 세종을 이어 조선 왕조 제5대 임금 문종으로 즉위하지만 2년 뒤 죽고 말았다.

세종과 그의 두 아들(세자와 안평대군)이 모두 우리 과학사를 빛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날의 '누런 비' 이후 거의 6세기나 지난 오늘의 한국에는 세종 3부자만큼도 과학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불합리한 한국사회가 새삼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