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강현철 국제부장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견해는 단호했다. 물론 "공황이 올 수도 있다"는 기존의 주장에서 "공황이나 패닉은 없을 것"이라고 후퇴하긴 했다.
하지만 세계경제 전망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며,각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크루그먼 교수로부터 세계경제 전망과 처방전을 들어봤다. 대담은 지난 16일 전화로 이뤄졌다.
크루그먼 교수는 한국경제신문과 한국경제TV가 18일부터 개최하는 '세계 경제금융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최근 미국의 일부 경제지표가 예상보다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각에선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정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내놓고 있는데요.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일부 지표가 호전된 것을 미국 경기회복의 신호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경기침체에 빠져드는 속도가 좀 늦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경제는 여전히 나빠지고 있습니다. 국내총생산(GDP)이나 실업률 등 각종 통계는 경기회복과 아직 배치됩니다. 물론 악화 속도가 더뎌졌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어느 정도 안정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
▶미국 경제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었는데요. 시각이 바뀐 건가요.
"기본적으로 비관적입니다. 그렇지만 공황 수준의 경기침체나 패닉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처럼 경제가 허약한 상태로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거품(버블)이 있었고,거품이 붕괴된 뒤 정상 상태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봅니다. "
▶그렇다면 앞으로 세계경제가 어떻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는지 궁금합니다.
"L자형 궤적을 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L자형 바닥에서 약간 상승할 수는 있겠지요. 지금 상황에서 언제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긴 매우 힘듭니다. 2차 대전 후에 모든 경기침체는 수출 붐을 통해 종식됐습니다. 이번엔 글로벌 금융위기가 겹쳐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수출 붐을 기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수출 대상을 다른 행성에서 찾지 않는 한 말이죠.내년에도 경제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긴 힘들 것 같습니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위기탈출 정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는데요.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취해진 조치는 경제위기의 충격을 줄이는 것이었지,회복을 위한 대책은 아니었습니다. 실업자만 해도 더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기회복을 위한 거대하고도 강력한 정책 집행입니다. 300만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강력한 경기부양책이 필요한 시점이죠.금융시장을 되살리기 위해 은행 등 금융권에 대한 강력하고 적극적인 금융정책도 필요합니다. "
▶오바마 정부의 위기대처 방법이 큰 틀에서도 잘못됐다는 말씀인가요.
"대부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규모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
▶아시아 국가들도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이나 유럽보다 위기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나라마다 사정이 다를 겁니다. 기본적으로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없다면 위기에서 벗어나긴 힘듭니다. 중국은 현재 부양책에 일부 문제가 있지만,빨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반면 대외무역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국가의 전망은 불투명합니다. "
▶한국 경제에 대해선 어떻게 내다보고 있습니까.
"한국은 대외 수출의존도가 매우 높은 제조업 국가입니다. 한국 일본 독일 같은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내부 시장에 문제가 없더라도 글로벌 경제위기의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취약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외환위기 때와 달리 재정균형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 여유가 있다는 점도 호평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위기는 그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위기가 내부에서 파생된 게 아니라 외부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원화 약세로 한국의 수출이 살아나는 기미이지만,세계무역이 위축되면서 수출주도형 국가인 한국도 동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봅니다. "
▶남북문제를 한국 경제에서 잠재적 위험요소로 꼽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특별한 위험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른 시간 내에 한국이 통일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통일이 되는 게 경제적으로는 리스크(위험) 요인일 수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는 것만 아니라면 남북관계가 한국 경제에 위험요소라고 보지 않습니다. "
▶일각에선 글로벌 경제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의 한계나 자본주의의 종언을 얘기하는데요.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회보장시스템을 더 강화하고 금융규제를 보강하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개량된 자본주의라고 해도 2차 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세계가 경험했던 자본주의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시절과 영국의 대처 시대 이후 자본주의의 자유화는 크게 진전됐지만 그런 자본주의는 현재 잘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세대 이전처럼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고 자본주의에 제한을 두는 식으로 가야 합니다. "
▶금융시장에 대한 적절한 개혁은 어떤 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규제를 많이 늘려야 합니다. 자본요건 등 투명성을 강화하고 다른 성격의 금융회사 간에 업무 분장도 확고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금융부문의 공격적 성향을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 미국에서 금융부문은 GDP의 8%,이익의 40%를 차지했는데 이는 금융부문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
▶경제위기로 세계 경제질서가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재편될 것이란 전망이 있습니다. 특히 중국 경제의 영향력이 훨씬 커질 것이란 시각이 많습니다만.
"중국의 경제력은 GDP 기준으로 현재 미국,유럽의 절반 정도입니다. 15년 후면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 최대가 될 것입니다. 20~25년쯤 후엔 시장가치 기준에서도 최대 경제규모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영향력도 자연스럽게 커지겠지요. 따라서 세계도 다극체제로 움직인다고 봐야 합니다. "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은 새로운 기축통화가 필요하다며 달러화 중심체제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는데요.
"달러 기축통화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축통화가 되는 것은 시장 선택의 결과입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달러가 믿음직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유럽연합(EU)의 경제력과 교역 규모가 미국에 필적하는 점을 고려하면 우선 유로가 달러의 라이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로 채권시장은 회원국의 다양성 때문에 세분화돼 있고,몇몇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국가는 신용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정리=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