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행복하려면 절망하라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요즘 세간에 잘 나가는 명강사를 꼽는다면 단연 C여사다. 공중파 방송, 기업, 기관 등에서 그녀를 초청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현직 카피라이터인 그녀의 애칭은 ‘행복 디자이너’.
“불행과 행복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의 스위치다. 행복은 켜고 안 켜고 자기 마음에 달렸다. 켤 것인가 끌 것인가. 그 선택에 의해 사주팔자가 바뀐다.”
이렇게 말하는 C여사는 남편의 직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창업 준비하고 있습니다. 15년째요.”
카피라이터답게 ‘백수’를 그렇게 표현한다.
어떤 상담자가 남편이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매일 부부 싸움을 한다고 하자 이렇게 쏘아붙인다.
“남편이 왜 실패하는 줄 아세요. 당신 때문입니다. 부인인 당신이 재수가 없어서요. 남편이 돈을 못 벌면 당신이 직접 벌면 되지, 왜 못 버는 사람 바가지 긁어서 괴롭힙니까? 못 벌고 싶어서 못 벌겠어요. 가장으로서 본인은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 남편에게 대들어서 더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면 행복합니까? 직접 나가서 버세요.”
재치 넘치는, 또는 직설적이고 걸쭉한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쏟아질 때마다 청강자들은 배꼽을 쥐고 자지러진다. 청강자들의 반응은 ‘후련하고 통쾌하다’ 일색이다.
세간에 ‘행복의 전도사’를 자칭하는 이가 많다.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행복론 한 번 설파하지 않은 설교자는 없다. 그런데 C여사의 행복론이 유독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고 카피같은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를 잘하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그녀가 불행과 시련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집안 환경은 불행했다. 가난한 집안의 어머니는 심한 관절염으로 문밖을 나가지 못해 늘 방안에 누워 있어야했다.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주정을 하며 누워있는 어머니를 때렸다. 그녀의 도피처는 문학이었다. 그녀는 가방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녔다. 한 입에 털어놓고 세상을 뜨기 위해서.
그녀의 배필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9살 연상의 작은 키에 가난한 3류 야간대학 남자였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처음으로 달동네에 8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진 집문서의 기쁨이란...... 하지만 그 기쁨은 두 달 만에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아이들 적금을 해약한 70만원으로 부산의 쪽방살이를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38세에 카피라이터로 입사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몇 년 전에야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모든 악조건을 행복의 조건으로 역전시켰다. 10원 한 장 들이지 않고 단지 생각의 스위치만으로 말이다. 이제 수많은 석학들이 그녀의 강의를 듣기위해 줄서고 있다.
그녀의 강의 내용은 과연 청강생들이 처음 듣는 고급정보이며 지식일까. 아니다. 어찌 보면 매우 진부한 행복학 개론에 불과하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강의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한 가지, 그녀 스스로가 행복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불리한 외모, 열악한 생활환경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만큼 더 깊은 절망을 경험했고, 그것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행복의 원천이 있는 게 아닐까. 결국 행복은 절망한 만큼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가 모방송에서 대담한 내용이 인상 깊다. 사회자는 이번 우주여행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게 무어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작년 우주선 발사 전에 언론사들로부터 독촉 받았던 내용과 같았다. 언론사들은 사진과 함께 실릴 멋진 명언을 원했다.
“우주에서 본 한반도는 하나였다.”
모 언론사는 이렇게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그녀가 털어놓는 소감은 이랬다.
“지구에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았어요.”
실제로 하늘에 올라간 거리는 비행기로는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서울에서 부산 거리 정도다. 이를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오랜 시간을 훈련받아야했다. 그렇게 해서 올라간 우주 생활은 기대와 달랐다. 지구에서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던 양치질, 세수, 목욕은 물론이고 음식조차도 구토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잠자고 숨 쉬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지구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감했다고 했다. 그녀는 지구를 떠나 있으면서 지구의 소중함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녀도 이를 행복이라 했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면서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느끼는 자가 얼마나 될까. 크게 보면 시련과 불행, 절망도 살아있음을 일깨우려는 자연의 섭리가 아닐는지. ‘삶’이란 ‘사람’을 줄인 말이다. (hooam.com)
☞ 차길진 칼럼 더보기
“불행과 행복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의 스위치다. 행복은 켜고 안 켜고 자기 마음에 달렸다. 켤 것인가 끌 것인가. 그 선택에 의해 사주팔자가 바뀐다.”
이렇게 말하는 C여사는 남편의 직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창업 준비하고 있습니다. 15년째요.”
카피라이터답게 ‘백수’를 그렇게 표현한다.
어떤 상담자가 남편이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매일 부부 싸움을 한다고 하자 이렇게 쏘아붙인다.
“남편이 왜 실패하는 줄 아세요. 당신 때문입니다. 부인인 당신이 재수가 없어서요. 남편이 돈을 못 벌면 당신이 직접 벌면 되지, 왜 못 버는 사람 바가지 긁어서 괴롭힙니까? 못 벌고 싶어서 못 벌겠어요. 가장으로서 본인은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 남편에게 대들어서 더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면 행복합니까? 직접 나가서 버세요.”
재치 넘치는, 또는 직설적이고 걸쭉한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쏟아질 때마다 청강자들은 배꼽을 쥐고 자지러진다. 청강자들의 반응은 ‘후련하고 통쾌하다’ 일색이다.
세간에 ‘행복의 전도사’를 자칭하는 이가 많다.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행복론 한 번 설파하지 않은 설교자는 없다. 그런데 C여사의 행복론이 유독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고 카피같은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를 잘하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그녀가 불행과 시련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집안 환경은 불행했다. 가난한 집안의 어머니는 심한 관절염으로 문밖을 나가지 못해 늘 방안에 누워 있어야했다.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주정을 하며 누워있는 어머니를 때렸다. 그녀의 도피처는 문학이었다. 그녀는 가방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녔다. 한 입에 털어놓고 세상을 뜨기 위해서.
그녀의 배필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9살 연상의 작은 키에 가난한 3류 야간대학 남자였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처음으로 달동네에 8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진 집문서의 기쁨이란...... 하지만 그 기쁨은 두 달 만에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아이들 적금을 해약한 70만원으로 부산의 쪽방살이를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38세에 카피라이터로 입사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몇 년 전에야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모든 악조건을 행복의 조건으로 역전시켰다. 10원 한 장 들이지 않고 단지 생각의 스위치만으로 말이다. 이제 수많은 석학들이 그녀의 강의를 듣기위해 줄서고 있다.
그녀의 강의 내용은 과연 청강생들이 처음 듣는 고급정보이며 지식일까. 아니다. 어찌 보면 매우 진부한 행복학 개론에 불과하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강의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한 가지, 그녀 스스로가 행복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불리한 외모, 열악한 생활환경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만큼 더 깊은 절망을 경험했고, 그것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행복의 원천이 있는 게 아닐까. 결국 행복은 절망한 만큼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가 모방송에서 대담한 내용이 인상 깊다. 사회자는 이번 우주여행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게 무어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작년 우주선 발사 전에 언론사들로부터 독촉 받았던 내용과 같았다. 언론사들은 사진과 함께 실릴 멋진 명언을 원했다.
“우주에서 본 한반도는 하나였다.”
모 언론사는 이렇게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그녀가 털어놓는 소감은 이랬다.
“지구에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았어요.”
실제로 하늘에 올라간 거리는 비행기로는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서울에서 부산 거리 정도다. 이를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오랜 시간을 훈련받아야했다. 그렇게 해서 올라간 우주 생활은 기대와 달랐다. 지구에서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던 양치질, 세수, 목욕은 물론이고 음식조차도 구토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잠자고 숨 쉬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지구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감했다고 했다. 그녀는 지구를 떠나 있으면서 지구의 소중함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녀도 이를 행복이라 했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면서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느끼는 자가 얼마나 될까. 크게 보면 시련과 불행, 절망도 살아있음을 일깨우려는 자연의 섭리가 아닐는지. ‘삶’이란 ‘사람’을 줄인 말이다. (hooam.com)
☞ 차길진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