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오는 2016년부터 자국 내에서 팔리는 모든 승용차 및 경트럭의 평균 연비를 갤런당 35.5마일(ℓ당 15.0㎞)로 강화하기로 하면서 현대 · 기아자동차 등 한국 자동차업계에 비상등이 켜졌다. 미국은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작년 한 해 동안 87만대 안팎을 판매한 최대 수출시장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연비 규제로 소형차 비중이 높은 현대 · 기아차와 도요타 폭스바겐 등이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지만 친환경차 시장을 놓고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고급차 업체 위축 불가피

연비 규제 강화가 한국 업체에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연비가 좋은 소형차 판매 비중이 높아서다. 현대 · 기아차의 소형차 판매 비중은 전체의 47% 수준이다.

GM의 글로벌 경 · 소형차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GM대우자동차 역시 젠트라 라세티 등 소형차 위주로 수출하고 있다. GM 내에서 GM대우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국내 업체들은 수년 전부터 연비 규제에 대응해온 데다 고연비 기술도 상당히 확보하고 있다"며 "세계 최대인 미국 시장에서 국산차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반면 고급차가 주력인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은 미국 시장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차와 친환경 경쟁 불가피

한국 업체들은 고연비를 무기로 점유율을 높여온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업체들과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일 전망이다. 하이브리드카와 전기차 등 친환경차 시장에서다.

친환경차 경쟁에서는 전 세계 하이브리드카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도요타가 일단 앞서 있다는 평가다. 이 회사는 최근 갤런당 50마일(ℓ당 21.3㎞) 연비의 제3세대 프리우스를 출시했다. 혼다 역시 신형 하이브리드카인 뉴 인사이트(41마일,17.4㎞)를 지난달부터 미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영재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일본 업체들이 하이브리드카 시장을 석권하고 있어 연비 경쟁에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국내 업체들이 2016년까지 기술적으로 연비 규제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라고 설명했다.

현대 · 기아차는 소형차 분야에서도 2016년의 연비 기준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 중 연비가 가장 좋은 베르나 1.6이 30.05마일(12.8㎞),프라이드 1.6이 29.5마일(12.5㎞) 수준이다. 승용차 기준(16.5㎞)을 맞추기 위해선 ℓ당 4㎞ 안팎 연비를 더 높여야 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차체를 경량화하는 한편 하이브리드카 수출 비중을 높여 전체 평균 연비를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 · 기아차 기회이자 위기

현대 · 기아차의 고급화 전략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평균 연비를 높이기 위해서는 소형차 비중을 높이거나 중 · 대형차 비중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프리미엄 세단인 제네시스에 이어 내년 하반기부터 신형 에쿠스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등 브랜드 고급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기계산업팀장은 "연비 규제를 맞추는 데만 신경쓰다 보면 자칫 브랜드 고급화가 뒤로 밀릴 수 있다"며 "이번 연비 규제 강화는 현대 · 기아차에 기회이자 위기"라고 말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