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인터뷰] "裸身에 대한 호기심 벗겨내고 예술의 옷 입히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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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누드화가 류영도
"친구들이 저보고 남의 옷을 벗겨서 돈 번대요. 하긴 그렇죠.스물네 살 때 처음 벗기기 시작해 쉰(한국 나이)이 돼서도 계속하고 있으니까요,하하."
지난 18일 오후 서울 연희동 서대문소방서 맞은편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류영도누드교실.낡은 카펫이 깔려 있는 작업실에서 전시회 준비에 몰두하던 누드화가 류영도씨(49)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쾌하게 웃는다.
전업 화가로 줄곧 누드만 그려온 그의 화실에는 벗은 여인들이 즐비하다. 한결같이 생기와 탄력이 넘치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물론 그림 속의 여인들이다. 그런데 그의 누드화는 좀 특별하다. 그림 속 여인들이 젊고 아름답긴 하나 관능적이지는 않다. 누드화를 볼 때 흔히 갖는 호기심과 남의 시선에 대한 부담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편안하다고 할까. '인체가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22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한 '한국구상미술대제전'(29일까지)과 곧이어 열릴 두 차례의 개인전(27일부터 6월2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6월11~17일 광주 대동갤러리)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에게 누드화를 고집하는 이유부터 물어봤다.
"회화의 기본은 누드입니다. 세계적인 화가 치고 인물화 안그린 사람이 몇이나 있나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협(한국미술협회)에 등록된 서양화가 1만5000여명 가운데 인물화가는 40~50명에 불과하고,그중 누드화가는 10명 미만이죠.풍경이나 정물화는 작가가 어떻게 그렸든 원래 그렇게 생겼다고 하면 되지만 인물화는 인체의 비례와 아름다움을 함께 담아내야 하니까 어려워요. 이처럼 중요한 누드화가 푸대접받는 게 싫어서 제 나름의 누드화를 그려왔습니다. 누드만큼 공부가 많이 되는 게 없거든요. 인물화의 대가이자 대학 은사이신 정승주 선생님(전 전남대 교수)과 역시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고요. "
▼ 화가들이 인물화,특히 누드화를 많이 그리지 않는 것은 단지 어렵기 때문입니까.
"돈이 안 된다는 점도 인물화,누드화를 기피하는 요인이죠.누드화를 그리려면 수시로 모델료를 줘야 하니까요. 또 서울에는 1996년 설립된 누드모델협회에 150여명의 회원이 있어서 그나마 형편이 낫지만 지방도시에서는 모델 구하기도 힘들어요. 전시회를 해도 인물화는 상대적으로 덜 팔려요. 다들 누드화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면서도 당당하게 가정이나 빌딩에 걸어 놓으려고는 않거든요. "
▼류 화백이 지향하는 누드화는.
"국내에서는 오래도록 화병과 책,커튼 등이 있는 정형적 누드화가 지배적이었어요. 19세기식 구도인데 저는 거기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죠.인물은 구상으로,배경은 추상으로 표현해서 구상과 비구상의 만남,여백의 미 등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누드화를 지향하는 것이죠.예술이란 사회보다 한 세기를 앞서가야 하는데 한 세기 전 누드화로는 곤란하지 않겠어요?"
▼섹시(?)하지 않은 누드화를 그리는 것도 그런 까닭인가요.
"지구상의 동물들 가운데 인간의 몸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누드는 포즈와 보는 각도에 따라 180도 달라져요. 사람의 표정이 얼굴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손짓,발짓,몸짓이 어우러져야 누드가 추하지 않고 아름다워집니다. 저는 탄력과 생기가 넘치는 건강하고 도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보니 주로 20~30대 모델을 많이 써요. 하지만 소품이나 비구상 이미지를 동원해 여성의 특정 부분을 가리거나 숨김으로써 말초적 자극을 피하는 대신 여체의 조형적 미감을 살리죠."
예향 광주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류 화백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의 피가 흘러서인지 공부하는 것은 짜증이 났지만 그림은 날밤을 새우며 그려도 좋았다. 중학교 때는 홍익대 중앙대 경희대 등이 주최한 미술실기대회에서 상도 잇달아 탔다.
그러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스무 살 때 부친이 쓰러진 후로 집에서 돈을 타 쓴 기억이 없다고 했다. 식당 주방에서 3년 동안 일하기도 했던 그는 "지금까지 고생한 이야기라면 소설책도 쓰겠지만 돌이켜서 뭐하겠느냐"며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고생한 기억이 징글징글한 탓이다.
군 제대 후 스물세 살에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졸업 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다. 그림이라도 실컷 그리다 죽자"며 광주에서 그림에 매달렸다. 5년 정도 죽기 살기로 했더니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30대 중반 무렵부터 그림이 팔리기 시작한 것.그러다 좀 더 넓은 곳으로 가자며 마흔에 상경,전업작가로 산 지 9년째다.
▼전업작가로 살아 보니 어떻습니까.
"상경 초기에는 정말 힘들었죠.그림으로 먹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치열하게 그렸겠습니까. 오전 10시에 작업을 시작하면 저녁 9시까지 하루 8~9시간 이상 목숨 걸고 그렸죠.후배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저는 '인내가 최고다'라고 말합니다.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화가로 성공합니다. 미협 회원들 중에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사는 화가는 0.5%도 안 돼요. 적어도 상위 10% 안에 들지 못하면 평생 고생하며 살아야 돼요. "
▼그림은 잘 팔립니까.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서울에 와서 집도 샀고 작업실도 있으니 성공한 셈이죠.제 그림이 호당 20~25만원가량 하는데 누드화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고 해서 잘 팔리는 편이에요. 20년 이상 하나의 테마로 작업했으니 뭔가 답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가에겐 50대가 절정기예요. 아직 열정과 에너지가 있을 때 대작을 많이 그려야죠.책가방이 크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은 그릇이 커야 많이 담을 수 있거든요. "
▼지금까지 그린 누드모델은 몇 명 정도인가요.
"글쎄요. 작년에 나온 제 화집에 128점의 누드화가 실렸으니까 일단 128명은 넘지요. 광주에선 모델이 드물어서 9년 동안 데리고 있던 모델도 있었어요. 그 친구는 나중에 서울까지 따라와서 같이 일했는데 엉덩이에 점 있는 것까지도 다 알 정도였죠.지금은 누드모델협회 소속 전속 모델 9명을 쓰고 있는데 모델마다 특징과 느낌이 달라서 3개월마다 바꿔야 해요. 한번은 아내가 목욕탕에서 만난 아가씨를 '꼬셔서' 데려온 적도 있어요. 키가 작은 탓에 신체 비례가 안 맞아서 그리지는 못했지만요. "
▼좋은 누드모델의 기준은 뭔가요.
"늘씬하고 예쁘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누드모델은 건강한 여성미와 비례를 중시하므로 머리와 어깨가 작고 엉덩이가 커야 돼요. 그래야 여성의 풍만함을 표현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가슴이 크면 머리와 바로 비교가 돼서 몸체가 커 보이므로 곤란하죠."
▼모델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겠어요.
"물론이죠.모델은 하루 3시간씩 주 2회 오는데요 20분 포즈를 취하고 10분 휴식합니다. 그야말로 중노동이죠.게다가 저는 여러 가지 포즈를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전문 모델이 아니면 힘들어요. 필요하면 남자 모델도 간혹 쓰는데 제 아들도 모델로 세운 적이 있어요. "
▼젊은 누드모델이 이성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까.
"비싼 모델료 주고 작업하는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사과나 꽃을 보듯 어떻게 하면 조형미를 완벽하게 표현할까 그 생각뿐이죠."
▼한꺼번에 세 곳의 전시를 준비 중인데 힘들지 않나요.
"7년 동안 준비한 작품 70여점을 내놓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스무 번 전시회를 했는데 이번이 제일 대규모예요. 150~300호짜리 대형 작품 11점을 비롯해 100호 40점,20~50호 20점 등 제 의지와 역량을 보이기 위해 대작들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제주도에 들어서는 복합예술공간 제주아트랜드 내 우산미술관에 걸릴 10m짜리 작품도 준비 중이고요. "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전에는 화폭에 보다 많은 걸 담으려고 애썼는데 요새는 비우려고 노력해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너는 재주를 감추면 그림이 돋보일 거다'라고 했는데 지금 그걸 느껴요. 최근 작품에 사람을 무채색으로 그리거나 비움과 채움의 조형적 구성을 지향하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그리고 연희동에 제 미술관을 하나 짓는 게 꿈입니다."
글=서화동/사진=정동헌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