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혀온 미국 달러화 가치와 국채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퇴조하는 등 투자게임 흐름이 바뀌는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21일 유로와 엔화를 포함한 6개 통화바스킷에 대한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지수는 81.079로 전날보다 1.2% 하락했다. 특히 유로화가 달러화 대비 4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유로화 가치는 이날 한때 1.3924달러까지 올라 1월5일 이후 최고치를 보이기도 했다. 달러 가치는 유로화에 대해 4월20일 이후 무려 7%가량 하락했다. 이날 달러화는 영국 파운드화와 일본 엔화에 대해서도 약세를 보였다. 도쿄시장에서는 달러당 93엔대까지 잠시 떨어지기도 했다. 4월 초만 하더라도 달러는 99엔대에서 움직였다.

달러 약세는 무엇보다 작년 10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촉발됐던 달러화 선호현상 퇴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 달러화 하락은 안전투자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로이터도 "달러 약세는 투자게임의 양상이 바뀌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용공포에 질렸던 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높은 수익을 좇기 위해 위험자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투자자들은 호주나 뉴질랜드 달러 또는 일부 신흥국 통화 등 위험통화자산 포지션을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 발빠른 헤지펀드들은 달러 · 엔 옵션 시장에서 달러가치 하락에 베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투자패턴이 이어질 경우 중장기적으로 달러화 약세 압력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CMC마켓의 애시라프 라이디 애널리스트는 "최근 달러 약세 흐름은 세계 자금시장의 돈이 원자재 등 위험자산 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S&P가 전날 국가 순채무가 국내총생산(GDP)에 맞먹을 정도로 불어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영국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낮추자 미국 재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점도 또다른 달러 약세 요인으로 작용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달러화를 찍어낼 경우 장기적으로 달러 가치 하락이 불가피해지고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채권 운영사 핌코의 설립자이자 최고 투자책임자인 빌 그로스는 "미국이 AAA 등급을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달러와 주식 채권 매도 확산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0.17%포인트 상승(채권값 하락)한 3.36%를 기록했다. 지난 3월보다 1%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미 재무부가 국채 발행을 계속 늘리자 미 국채 투자 매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미 정부는 다음 주에만 1010억달러의 국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외환시장 일각에서는 △안전자산 선호현상 퇴조 △재정적자 증가 △국채 발행 급증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 등 달러 가치 하락요인이 한꺼번에 부각되자 유로 · 달러가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비랄 하피즈 외환담당 책임자는 "유로 · 달러가 올 여름에 1.50달러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달러화가 기축통화인 데다 미 경제가 회복세를 보일 경우 달러 가치 하락 현상이 추세적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