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가 평양처럼 될 것 같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지 닷새 만인 지난 1월25일 워싱턴포스트(WP)가 예상한 미국의 권력 지형도다. WP는 금융 · 경제위기를 계기로 금융권력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가 붕괴되고,제조업의 메카인 디트로이트 자동차산업 벨트가 무너지면서 워싱턴DC의 중앙정부로 파워가 집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정부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시장권력까지 접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주요 기업 줄줄이 부분 국유화

이런 오바마 권력의 친위대는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다. 이들은 시장의 금융귀족들인 투자은행,상업은행들에 7000억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우선주를 인수했다. 이미 씨티그룹 AIG 크라이슬러 등이 부분 국유화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씨티그룹 등의 이사진 개편에도 관여했다. 스트레스 테스트(자본충실도 테스트) 결과 자본이 부족한 은행들은 민간자본을 유치하지 못하면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정부에 주요 주주나 지배주주 자리를 내줄 판이다. 제너럴모터스(GM)는 국유화를 자청했다. 정부가 지분 50%를 갖도록 하는 구조조정안을 내놓았다. 194억달러를 투입한 정부는 GM의 릭 왜고너 회장을 축출했다.

자본주의 근간인 시장경제 체제에서 시장의 대척점은 정부다. 미국은 가능한 한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지향해왔다. 하지만 작은 정부가 시장의 무질서를 방임해 붕괴를 초래했으며,이는 결국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게 오바마 대통령의 지론이다. 그가 시장에 새로운 질서를 찾아주기 위해 내세운 최대 명분은 경제회생이고,최대 수단은 개입과 간섭의 다른 이름인 규제 · 감독이다.

미 재무부가 규제의 칼을 들이댄 곳은 금융위기 주범으로 지목된 장외 파생상품 시장이 대표적이다. 약 200조달러로 추정되는 미국 내 파생상품 시장 가운데 96.6%가 장외 파생상품 시장이다. 지금까지 시장의 자율규제에 맡겨왔지만 재무부는 앞으로 장외 파생상품 거래현황을 감독당국에 보고토록 하고,거래소를 통해 결제토록 하는 사상 첫 규제안을 마련했다.

오바마 정부는 감독당국 자체도 강화키로 했다. 대형 금융사를 규제하고 감독할 권한을 FRB에 몰아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FRB를 '슈퍼캅(슈퍼경찰)'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권한 집중에 반대하고 있으나 어떤 형태로든 유례없이 강력한 감독체제가 연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또 SEC는 지난 20일 상장기업의 사외이사를 지명해 선출할 권한을 소액주주들에게 주는 파격적인 규정 개정안을 발표했다. 경영진에 대한 과도한 보수지급 등 경영진의 전횡을 막는다는 취지이지만 기업지배구조 영역마저 손보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주력산업의 물길도 제시했다. 그는 "금융시장의 수익에 지나치게 의존해 성장한 미국 경제는 카드로 만든 부실한 집이었다"면서 그린에너지 산업 등 제조업 기반의 경제성장을 역설했다. 사이먼 존슨 미 MIT대 교수에 따르면 금융산업의 영업이익이 미국 내 기업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3~85년 16%에 불과했으나 2000년대 들어 41%로 급등했다.

◆"제4파의 국가 자본주의 시대 도래"

이안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사장은 외교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 5 · 6월호에 기고한 '자유시장의 종말?'이라는 기고문에서 금융 · 경제위기의 특수한 상황에 처해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이 시장에 개입하는 현상을 "제4파의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가 도래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개발도상국들이 석유기업을 정치적 목적으로 계속 지배하는 방식과는 다른,일시적이고 불가피한 개입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문제는 시장의 반발이다.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등 일부 우량 금융사가 구제금융 자금을 정부에 조기 상환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정부의 간섭을 받기 싫다는 메시지다. 헤지펀드 등 일부 소규모 채권단이 부채 탕감을 거부하는 바람에 크라이슬러를 파산보호 신청한 오바마는 이들을 '투기꾼'이라고 공개적으로 낙인찍었다. 시장은 부글부글 끓었다. 200억달러를 운용하고 있는 클리포드 애스네스 AQR 캐피털 매니지먼트 헤지펀드 이사는 "일부 헤지펀드가 끝까지 버틴 것은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스런 시장논리였다"면서 "대통령의 비난은 우리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올바로 작동하는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고 격분했다. 금융권 부실자산 처리용 민 · 관공동펀드에 재무부가 헤지펀드를 비롯한 민간자본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순적 태도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AIG의 거액 보너스 지급 논란이 일자 미 정부는 지난 2월 구제금융을 받는 금융사의 임직원 보수를 50만달러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업계의 반발에 최근 "보수제한을 하지 않겠다"고 슬며시 후퇴한 쪽은 가이트너 재무장관이었다. 시장통제와 경제회생이란 오바마 권력의 두 마리 토끼 몰이가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