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영업맨인 김 과장.그는 요즘 동료들보다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구조조정이니 하는 말이 나와도 자리 걱정을 할 염려가 없어서다. 경기가 나빠져 그의 영업 실적도 뒷걸음질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업맨들의 몸값도 높아졌다. 행여 그가 경쟁사로 옮겨갈까봐 상사는 틈만 나면 "도와줄 일 없냐"며 챙긴다.

김 과장이 이 같은 대우를 받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초창기 영업맨 시절 수도 없이 좌절을 겪었다. 얼토당토 않은 요구에다 수모를 당하기도 수십 차례.'오늘로 끝내자'고 다짐했던 게 불과 엊그제다. 이런 수난을 겪으면서 김 과장은 알았다. '영원한 을(乙)'이 살아가는 방법을.그래서 요즘은 출근할 때 간과 쓸개는 물론 영혼까지 집에 빼놓고 온다. 김 과장이 말하는 영업의 정의는 고객의 마음을 사는 것.전국의 '영업의 달인'으로부터 고객의 마음을 사는 방법에 대해 들었다.

◆고객을 잡기 위해서라면 '불쇼'도 한다

한 제약회사 청주지점의 13년차 영업사원인 김모씨(37).매일 의사들을 만나 약을 파는 게 그의 일이다. 그는 출근할 때 '오늘의 컨셉트'를 정한다. 지난주에는 개그콘서트의 유행어 "니들이 고생이 많다"를 따라하며 의사들의 배꼽을 뺐다. 이번 주에는 최근 인기를 끄는 와인을 하나 소개할 계획이다.

그는 작년까지 3년 연속 전국 제약 영업 1등을 차지했다. 작년엔 부상으로 8000만원의 보너스와 고급 승용차 한 대를 받았다. 영업맨 초년병 시절 의사를 만나면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더듬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이 "피갈이를 했다"고 표현한다. 영업맨 체질로 성격을 확 뜯어고쳤다는 얘기다.

그의 영업 비결은 '맥가이버식 서비스'다. 자동차 상식이 풍부한 점을 활용해 각종 정비기술을 독학으로 익혔다. 순전히 영업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최근엔 한 병원장의 펑크난 승용차를 끌고 가 직접 수리해 주기도 했다. 의사들이 데모를 할 때는 봉고차를 몰며 운전기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는 진통제를 먹고 학회가 열리는 호텔 부근 술집에서 맥주병 뚜껑을 눈에 끼고 춤을 추는 기쁨조 역할을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메리츠화재에 다니는 펀드영업 담당 이모씨(32)는 '불쇼'의 달인이다. 고객과 술자리라도 갖는 날이면 팔 다리에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서 감고 테이블 위에 올라 불을 붙인 뒤 막춤을 춘다. 휴지가 순식간에 타 버리기 때문에 데이진 않는단다. 그는 "몸이 아파도 술자리는 빼지 않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실적이 올라 있다"며 "영업을 하면서 술자리 엔터테인먼트는 못하는 게 없게 됐다"고 말했다. 입사 3년차인 그는 벌써 억대 연봉을 받는다.

◆신속한 일처리와 진실된 마음도 비결

맥가이버나 기쁨조 역할만이 영업왕의 비결은 아니다. 영업왕에겐 나름대로의 비기(秘技)가 있다. 고객에 대한 진실하고도 따뜻한 마음과 신속하고 정확한 일처리도 그중 하나다.

신재범 우리투자증권 강남대로지점 차장.그는 연간 영업실적 기준으로 작년까지 3년 연속 전국 톱10 안에 든 영업의 달인이다. 그의 비결은 역지사지와 스피드정신이다. 신 차장은 "고객이 요구하는 건 무조건 해드리겠다고 한 뒤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며 "안 되는 것도 간혹 있지만,열심히 했는데 안 된다고 설명하면 대부분 수긍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되든 안 되든 고객들에게 빨리 피드백을 해 주는 스피드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우순일 신한은행 석남동지점 과장은 작년 하반기 개인영업부문 최우수 직원으로 선정됐다. 그의 비결은 다른 게 아니다. 사람에 대한 진실하고도 따뜻한 마음이다. "노점상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가 매일 몇 천원,몇 만원씩 입금하며 흙 묻은 돈을 저축하셨는데,어머니 생각이 나서 잘 해드리려고 애썼더니 어느 날 거액의 토지 보상금을 들고 오셨다"는 게 그의 경험이다. 따뜻한 마음이 할머니를 움직였다는 얘기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그런 경우다. 그들의 해외 송금을 적극적으로 처리해 줬더니 주변 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 과장만을 찾아 외환 실적도 늘었다고 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애환을 모른다



영업의 달인은 거저 되는 게 아니다. 반드시 말 못할 애환을 겪어야 한다. 그들의 '무용담'을 듣자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정도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영업맨 생활을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한 제약회사에서 약국을 상대로 영업하던 김모씨(43)는 최근 사표를 냈다. 거래처인 약국에 갔다가 약사가 '재수 없다'며 뜨거운 커피를 뿌리는 통에 목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그는 "회사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태어난 뒤 처음 큰 소리로 통곡했다"고 한다.

게다가 정부가 '불법 리베이트를 근절한다'고 발표하면서 회사에서 영업비의 상당부분을 삭감했다. "매년 실적을 향상시키지 못하면 그만둬야 하는 게 관행이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을(乙)의 을(乙)'들의 애환은 더하다. H캐피탈에 다니던 박모씨(30)는 작년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가 맡았던 업무는 자동차 리스계약.직접 소비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자동차 영업사원을 상대로 리스고객을 넘겨받는 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자동차 영업사원들은 고객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몽땅 그에게 풀었다. 고급 술집에서 매일같이 술판을 벌여야 했다. 영업비와 월급을 몽땅 술값으로 털어넣어도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20대 후반에 벌써 간이 망가졌다.

◆'영업맨'만의 희열에 산다

영업의 달인들은 "영업 업무에 중독성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윤승식 삼성토탈 영업1팀 대리(34)는 "한 달에 평균 3000㎞씩 운전하고,목표를 채우지 못할 때는 며칠이나 잠을 설치지만 경쟁업체를 꺾었을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획이나 인사 파트 등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영업맨만의 희열이 있다는 얘기다.

회사에서 직접 돈을 버는 부서는 영업팀밖에 없다는 것도 영업맨들의 자부심이다. 윤 대리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며 동료들을 보다가 문득 '내가 영업해서 버는 돈으로 동료들 임금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소를 짓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영업 9년차인 배새길 LG하우시스 프로젝트 영업팀 과장(36)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거래처 직원이 술자리에서 '나는 LG하우시스랑 거래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랑 거래하는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이 맛에 영업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영업의 달인들은 영업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상은/이관우/이정호/정인설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