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58) 아모레퍼시픽 ‥동백기름 짜서 팔던 개성상인 '대한민국 화장품 신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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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는 지난해 국내 화장품 중에서 처음으로 단일 품목 매출액 5000억원을 돌파했다. 한방화장품 개발에 열정을 쏟은 지 42년 만에 일궈 낸 성과다. 1967년부터 인삼 중심의 한방 미용법 연구에 착수,1973년 인삼에서 추출한 유효 성분을 이용해 한방화장품 '진생삼미'를 출시한 것이 설화수의 출발.이어 1987년에 '설화'를 내놓았고 1997년 경희대 한의과대와의 공동 연구로 효능을 개선한 '설화수'를 탄생시켰다. 설화수는 지난해 5040억원의 매출을 기록,'슈퍼 메가 브랜드' 반열에 올라섰다. 서경배 대표(46)는 "2015년까지 설화수의 매출액 1조원을 넘기고 '설화수급' 슈퍼 메가 브랜드도 5개 만들겠다"고 밝혔다.
아모레퍼시픽은 1932년 개성에서 서성환 회장(2003년 작고)의 모친인 윤독정 여사(1959년 작고)가 여성들이 머리카락 손질에 사용하는 동백 기름을 가내 수공업으로 짜 판 것이 출발점이다. 당시 동백 기름은 아주까리 기름이나 꿀밀에 참기름을 섞어 만든 왜밀 기름에 비해 비쌌지만 품질이 좋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윤 여사는 동백 기름으로 돈벌이가 잘되자 1937년 창성상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미안수(스킨로션),구리무(크림) 등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 모친의 장삿일을 돕던 서 회장은 1943년 개성 김재현백화점에 화장품 코너를 개설하면서 경영을 도맡아했다. 하지만 이듬해 징용돼 장사를 접었던 서 회장은 1945년 태평양을 설립하고 화장품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 상점을 냈지만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가야 했다. 이곳에서도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 서 대표는 "아버님은 부산 피난 시절 찾아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일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고 늘상 말씀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1954년 1월 서울로 올라온 서 회장은 후암동에 공장을 마련했다. 주문받은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수시로 직원들과 함께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하지만 당시 미군 부대에서 나온 PX제품과 밀수품이 유통되면서 국내 화장품 업체들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서 회장은 "어정쩡한 제품을 팔아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만큼 최고 품질의 화장품을 만들어야 한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서 회장은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10여년간 투자를 늘렸다. 화장품 연구실을 만들고 최신 제분기를 도입한 데다 프랑스 화장품 회사인 코티와 기술 제휴를 맺고 공장까지 신축했다. 특히 서울 신대방동 공장 신축이 한창이던 1962년께는 자금 부족으로 업계에 "곧 망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실제 결제 자금 부족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서 회장은 그간 신용을 쌓아 온 거래 상인들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서 회장은 기존 판매상들이 덤핑 판매 등으로 어지럽혀 온 화장품 유통시장에도 혁신적인 변화를 줬다. 1962년 지정 판매소(매장) 운영과 64년 여성 판매원의 가정방문 판매를 통한 가격 정찰제 및 판매구역 준수 방식으로 유통 시스템을 바꿔 놨다. 이때 방문 판매용으로 선보인 화장품 브랜드가 '아모레(AMORE)'다. 아모레라는 이름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영화 '형사'에 삽입된 노랫말 '아모레 미오(amore mio · 나의 사랑)'에서 따 왔다. 방문 판매 도입 후 1970년대 말까지 연평균 30~60%의 매출 신장을 가져왔다. 이렇게 출발한 여성 판매원 수가 현재 3만2000여명에 달하고 매장 수는 1185개에 이른다.
아모레퍼시픽도 1980년대 산업계를 풍미했던 사업다각화 열풍에 동조,패션 야구단 증권 생명보험 등으로 사세를 키웠다. 하지만 사업 다각화는 경영난을 가져왔고 이는 주력인 화장품 사업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화장품시장 개방(1986년)과 맞물려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즈음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졸업(1987년)하고 경영관리실 과장으로 입사한 서 대표는 1992년 말 폐암 수술을 받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획조정실 사장을 맡아 사실상 경영을 총괄하게 됐다. 서 대표는 "사업 다각화 실패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은 아버님이 병상에서 '화장품에 승부를 걸라'며 유언처럼 남긴 말씀에 따라 90년대 중반까지 구조조정을 했다"며 "결국 아버님 말씀대로 한 것이 외환위기 때 더 강한 기업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들어 기능성 화장품인 '아이오페 레티놀'을 비롯 설화수 헤라 아이오페 라네즈 마몽드 등 히트 상품을 줄줄이 내놓고 미주 아시아 유럽 등 해외시장 공략에 나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2003년 기업이미지(CI) 개편으로 만든 '아모레퍼시픽' 브랜드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과 니먼 마커스 백화점에 입점하는 등 미국 시장에 입성했다. 또 2006년에는 일본 오사카의 한큐백화점과 도쿄의 이세탄백화점에도 매장을 냈다. 특히 '롤리타 렘피카' 향수는 론칭 10년 만인 지난해 프랑스 시장에서 2.5%를 점유하며 샤넬 자도르 엔젤 등과 경쟁하는 5대 향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서 대표의 소장품 1호는 '아버지 여권'이다. 서 대표는 "지난 60년 아버님이 프랑스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만들었던 낡은 여권은 이제 제가 해외 시장에 나갈 때마다 힘과 용기를 줘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 대표는 "2010년까지 500억원을 투입해 용인에 2만5000㎡ 규모의 제2연구소를 짓는 등 글로벌 톱을 향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조5313억원의 매출을 올린 아모레퍼시픽은 2015년 5조원의 매출을 달성해 글로벌 10위 안에 드는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비전을 세워 놓고 있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
아모레퍼시픽은 1932년 개성에서 서성환 회장(2003년 작고)의 모친인 윤독정 여사(1959년 작고)가 여성들이 머리카락 손질에 사용하는 동백 기름을 가내 수공업으로 짜 판 것이 출발점이다. 당시 동백 기름은 아주까리 기름이나 꿀밀에 참기름을 섞어 만든 왜밀 기름에 비해 비쌌지만 품질이 좋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윤 여사는 동백 기름으로 돈벌이가 잘되자 1937년 창성상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미안수(스킨로션),구리무(크림) 등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 모친의 장삿일을 돕던 서 회장은 1943년 개성 김재현백화점에 화장품 코너를 개설하면서 경영을 도맡아했다. 하지만 이듬해 징용돼 장사를 접었던 서 회장은 1945년 태평양을 설립하고 화장품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 상점을 냈지만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가야 했다. 이곳에서도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 서 대표는 "아버님은 부산 피난 시절 찾아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일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고 늘상 말씀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1954년 1월 서울로 올라온 서 회장은 후암동에 공장을 마련했다. 주문받은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수시로 직원들과 함께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하지만 당시 미군 부대에서 나온 PX제품과 밀수품이 유통되면서 국내 화장품 업체들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서 회장은 "어정쩡한 제품을 팔아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만큼 최고 품질의 화장품을 만들어야 한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러면서 서 회장은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10여년간 투자를 늘렸다. 화장품 연구실을 만들고 최신 제분기를 도입한 데다 프랑스 화장품 회사인 코티와 기술 제휴를 맺고 공장까지 신축했다. 특히 서울 신대방동 공장 신축이 한창이던 1962년께는 자금 부족으로 업계에 "곧 망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실제 결제 자금 부족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서 회장은 그간 신용을 쌓아 온 거래 상인들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서 회장은 기존 판매상들이 덤핑 판매 등으로 어지럽혀 온 화장품 유통시장에도 혁신적인 변화를 줬다. 1962년 지정 판매소(매장) 운영과 64년 여성 판매원의 가정방문 판매를 통한 가격 정찰제 및 판매구역 준수 방식으로 유통 시스템을 바꿔 놨다. 이때 방문 판매용으로 선보인 화장품 브랜드가 '아모레(AMORE)'다. 아모레라는 이름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영화 '형사'에 삽입된 노랫말 '아모레 미오(amore mio · 나의 사랑)'에서 따 왔다. 방문 판매 도입 후 1970년대 말까지 연평균 30~60%의 매출 신장을 가져왔다. 이렇게 출발한 여성 판매원 수가 현재 3만2000여명에 달하고 매장 수는 1185개에 이른다.
아모레퍼시픽도 1980년대 산업계를 풍미했던 사업다각화 열풍에 동조,패션 야구단 증권 생명보험 등으로 사세를 키웠다. 하지만 사업 다각화는 경영난을 가져왔고 이는 주력인 화장품 사업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화장품시장 개방(1986년)과 맞물려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즈음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졸업(1987년)하고 경영관리실 과장으로 입사한 서 대표는 1992년 말 폐암 수술을 받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획조정실 사장을 맡아 사실상 경영을 총괄하게 됐다. 서 대표는 "사업 다각화 실패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은 아버님이 병상에서 '화장품에 승부를 걸라'며 유언처럼 남긴 말씀에 따라 90년대 중반까지 구조조정을 했다"며 "결국 아버님 말씀대로 한 것이 외환위기 때 더 강한 기업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들어 기능성 화장품인 '아이오페 레티놀'을 비롯 설화수 헤라 아이오페 라네즈 마몽드 등 히트 상품을 줄줄이 내놓고 미주 아시아 유럽 등 해외시장 공략에 나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2003년 기업이미지(CI) 개편으로 만든 '아모레퍼시픽' 브랜드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과 니먼 마커스 백화점에 입점하는 등 미국 시장에 입성했다. 또 2006년에는 일본 오사카의 한큐백화점과 도쿄의 이세탄백화점에도 매장을 냈다. 특히 '롤리타 렘피카' 향수는 론칭 10년 만인 지난해 프랑스 시장에서 2.5%를 점유하며 샤넬 자도르 엔젤 등과 경쟁하는 5대 향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서 대표의 소장품 1호는 '아버지 여권'이다. 서 대표는 "지난 60년 아버님이 프랑스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만들었던 낡은 여권은 이제 제가 해외 시장에 나갈 때마다 힘과 용기를 줘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 대표는 "2010년까지 500억원을 투입해 용인에 2만5000㎡ 규모의 제2연구소를 짓는 등 글로벌 톱을 향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조5313억원의 매출을 올린 아모레퍼시픽은 2015년 5조원의 매출을 달성해 글로벌 10위 안에 드는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비전을 세워 놓고 있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