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기업도 잘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회장 재임 시절 꿈이기도 했죠."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사진)이 지난 27일 오후 연세대학교 상남경영원에서 한국이사협회 주최로 열린 '기업 지배구조와 사외이사제도-지난 10년을 평가한다' 세미나에 참석,회장 시절의 소회와 포스코를 포함한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에 대한 견해를 밝히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회장이 지난 2월 포스코 회장직을 사임한 후 공식행사에 참석해 기업 경영 및 지배구조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토론자로 나온 이 전 회장은 세계적 수준으로 자리잡은 포스코의 지배구조를 확립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꼽았다. 그는 "2000년 민영화에 앞서 포스코는 1997년부터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해 현재 15명의 이사회 멤버 중 9명이 사외이사"라며 "그동안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한 사외이사 선임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이사회 의장과 최고경영자(CEO)를 분리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앞선 이사회 시스템을 마련한 것으로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제도에 대한 숨겨진 고민도 털어놨다. 그는 "2000년 민영화 이후 사회적 분위기는 기업의 효율성보다 투명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갔다"며 "포스코는 특히 경영진을 감독할 수 있는 사외이사가 필요했고,실제로 그렇게 이사회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분명 사외이사들의 힘은 엄청 커졌다"며 "경영진 감독과 의사결정 참여 사이에서 사외이사의 역할을 과연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의 문제와 누가 어떻게 사외이사들을 평가하느냐는 점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사외이사의 큰 덕목 중 하나인 균형감각을 갖춘 인물로는 교수들을 꼽을 수 있는데,교수가 이사회에 참여하면 회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단점이 있다"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이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의 지배구조가 국내 대기업들에 모범적 대안이 될 것이라고 이 전 회장은 내다봤다. 그는 "국내에서는 높은 상속세로 인해 10년 또는 20년 후 대주주가 기업을 지배하기는 점차 힘들어질 것"이라며 "아무래도 전문경영인들의 역할이 점차 커질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상황"이라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펼치고 있는 포스코의 현 경영시스템이 모범적인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사회 '운영'의 중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제도가 조금 미비하더라도 운영의 묘를 살리면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전 회장은 "정말 중요한 것은 이사회 멤버 간의 신뢰와 팀워크"라며 "포스코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의 투자자 워런 버핏의 말대로 사외이사에겐 전문성과 독립성도 중요하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이 가장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마지막으로 국내 대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중장기적 연구와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앞으로 수십년 후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며 "한국의 정서에 맞고 합리적인 대안을 기업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연구하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한국이사협회장인 서윤석 이화여대 교수(전 포스코 이사회 의장)를 비롯해 박영석 이화여대 교수,김유진 이곤젠더 인터내셔널 부사장,지동현 KB금융지주 부사장이 주제발표를 했다. 토론자로는 이 전 회장과 함께 김일섭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회장,김건식 서울대 법과대학장,박상용 연세대 경영대학장 등이 나왔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