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집은 너무 익숙해서,우리가 집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거나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찬찬히 살피면,집은 현대에서 비로소 나온 멋진 기술이 빚은 작품이고 덕분에 우리는 그 속에서 안락하게 산다.

나이 든 세대들이 20세기 중반에 살았던 집과 비교해 보면,이 점이 또렷해진다. 그때 한 끼를 마련하려면 힘든 노동이 필요했다. 먼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우물이나 샘에서 물독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와야 했다. 날씨가 궂으면,특히 눈으로 미끄러운 겨울엔,이것은 꽤나 고된 일이었다.

불을 때는 것도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땔감은 나무,나뭇잎,볏짚,보릿짚,왕겨,마른 풀 등 타는 것은 모두 긁어 모아 마련했다. 그렇게 다양하고 화력이 고르지 않은 땔감들이 일정한 화력을 내도록 하려면,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땔감이 귀했고 화력은 약했으므로,여러 음식을 조리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하긴 그렇게 풍성한 식탁을 꾸릴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하루 세 끼 찾아 먹으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그때 집안은 늘 어둠침침했고,밤이면 그을음이 나는 석유 등잔 하나에 의지했다. 어쩌다 촛불을 밝히게 되면,그리도 밝아서 감탄하곤 했다. 집안에 전기와 수도와 가스가 들어오면서,집안 살림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제 현대의 집들은 19세기의 국왕은 꿈도 꾸지 못한 안락함을 제공한다.

당연히 우리 삶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런 변화는 대체로 바람직했지만,아쉽게도 사람들이 자연 환경으로부터 너무 멀어졌다. 지금 집들은 외부 세계를 하도 잘 차단하기 때문에,자연 환경은 집밖에 놓이고,집안의 사람은 인공적 환경에서 산다. 이런 상황이 사람에게 좋을 리 없다. 우리는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았고 거기 맞게 진화했다. 갑작스레 인공적 환경 속에 놓이면,우리 몸과 마음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모든 것을 가게에서 사는 현대 도시의 삶은 사정을 악화시킨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집안이 전업으로나 부업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텃밭에서 작물을 가꾸는 일을 도왔고 자연스럽게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살피게 됐다. 무거운 흙덩이를 밀치고 돋는 콩이나 옥수수의 싹은 얼마나 예뻤던가! 호박이나 울콩 줄기가 울타리를 타고 뻗어가는 것을 살피는 것은 얼마나 흐뭇했던가!

요즈음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보기보다 훨씬 큰 손실이다. 마늘이나 옥수수 같은 작물이 자라도록 보살피는 것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작물이 제 천성을 펼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돕는 일이지,자신의 생각대로 생명이 없는 재료를 다루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물의 천성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참을성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강제하지 않고 상대의 천성을 존중하고 보살핀다는 점에서,작물을 가꾸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귀는 일과 본질적으로 같다. 감옥에서 원예를 배운 죄수의 재범률이 다른 죄수에 비해 훨씬 낮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원예는 사람과 사귀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사람이 지니도록 돕는 듯하다.

현대의 집은 멋진 기계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계 안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데 보이지 않는 값을 치른다. 자연의 완벽한 차단은 그런 값의 일부다. 만일 부모가 자식이 베란다의 화분에 꽃을 가꾸도록 격려하고 학교가 원예를 가르친다면,사정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자기가 모종한 봉숭아가 꽃을 피우는 것을 보는 일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경험이다. 이런 일에 투자되는 시간과 돈은 얼마 되지 않지만,아이들의 심성은 상당히 순화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