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관청에서 문서 꾸러미나 물건을 운송할 때 기밀 유지를 위해 사용했던 백제 목간(木簡)이 최초로 공개됐다. 또 국내 출토 목간 중 가장 크고 긴 목간과 국내 최고(最古)의 태극문양이 그려진 목제품도 첫 선을 보였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주변 지역에서 지난해 발굴한 목간 3점을 포함해 총 31점의 백제시대 목간을 보존처리한 뒤 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목간은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목재를 길고 좁게 다듬어 만든 나무판으로 고대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된 기록유물의 하나다. 직경 5.6m,깊이 4.8m의 백제 사비 시기(538~660년) 대형 원형 수혈유구(구덩이)에서 일괄 출토된 이들 목간 중 13점은 먹글씨가 잘 남아 있고 판독이 가능하다. 또 문서목간,꼬리표(付札)목간,봉함목간,나무의 여러 면을 깎아 만든 다면목간,글씨 연습을 한 습자(習字)목간 등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굴된 목간 중 가장 다양한 종류가 한 곳에서 수습돼 백제시대 지방통치제도와 경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출토된 목간의 수량도 부여 능산리사지(37점)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이날 새로 공개된 28점의 목간 중 길이 60.8㎝,너비 5.2㎝,두께 1㎝의 목간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목간 중 가장 크고 긴 것으로,'受米之(수미지)…''貢之(공지)' 등 총 57자의 먹글씨가 확인됐다. 김 소장은 일부 확인된 글자들로 미뤄 지방관청에서 공납과 그 과정을 기록한 행정문서 목간으로 추정했다.

또 국내 최초로 발견된 봉함(封緘)목간은 소나무로 만든 여타 목간과 달리 옻나무로 만들었으며 겉면에는 '?C?C上(상)…'이라는 글자,속면에는 '?C第十一草(제십일초)…'라는 글자가 있어서 '~에게 올림'과 같은 보고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공개된 31점의 목간 중 옻나무 목간은 이 목간과 '上?C三石(상?C삼석 · ~삼석을 보낸다)'라는 글자가 있는 목간 등 두 점 뿐이다.

백제의 촌락문서 겪인 목간에는 '대사촌(大祀村)'이라는 백제 촌락 이름이 처음으로 확인됐고,형(形)이라는 토지단위와 백전(白田) · 맥전(麥田 · 보리밭) · 수전(水田 · 논) 등 토지의 경작형태,'72석(石)' 등 소출량이 기록돼 있어 백제 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주목된다. 이 목간에는 '수전 2형(形)에서 72석(石)을 얻고''백전 1형에서 62석을 얻고' 등의 내용이 뚜렷이 확인됐다.

아울러 양면목간의 한쪽 면에서 발견된 '幷之(병지)'라는 글자로 미뤄 이두가 백제 때부터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고 김 소장은 설명했다. '之(지)'는 '~하다'라는 백제식 이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또 인력 관리에 관한 내용,토지단위당 생산량,지명과 관직명 등을 포함한 목간도 다수 확인돼 영산강 유역의 나주 복암리 일대가 7세기 무렵 백제 지방통치의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목간 외에도 살구씨,밤,솔방울,금동귀고리,나무바가지 조각,기와,사발,숫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으며 특히 칼 모양의 나무판에 태극문양을 그린 목제품 한 쌍은 국내 최고의 태극문을 담은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으로 알려진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682년)보다 앞서는 것으로,주역이나 오행(五行) 또는 그와 밀접한 도교사상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됐다.

김 소장은 "이들 목간은 함께 출토된 토기와 기와 등으로 볼때 7세기 초 유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백제의 도성이 아닌 지방에서 발견된 데다 그 종류와 내용이 다양해 문헌사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