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시작된 러 · 일 전쟁 초기 일본군은 큰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주의 수질이 나빴던 탓에 많은 군인들이 배탈 설사로 급사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일왕은 "배탈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을 최우선으로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다이코신약이 이 일을 해냈다. '배앓이'에서 해방된 일본은 이듬해 승전보를 울렸고,일왕은 일등공신인 이 약에 '정로환(征露丸 · 러시아를 정복한 환약)'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하지만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정로환이 '한국의 가정 상비약'이 된 것은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뒤였다. 1972년 동성제약이 다이코신약의 전임 공장장을 포섭해 정로환(正露丸으로 개명)을 자체 개발하기 전까지 국내에 수입되는 물량은 극히 한정됐기 때문이었다. 출시 첫 해에 50억원 매출을 올린 '동성 정로환'은 지금도 관련 시장의 90% 가량을 점유하며 우리 국민들의 배탈 설사를 잠재우는 '엄마 손' 역할을 하고 있다.

정로환과 함께 세븐에이트 훼미닌 등 '염색약의 명가'로도 잘 알려진 동성제약의 역사는 지난해 작고한 고(故) 이선규 회장(1924년생)의 개인사와 궤를 같이 한다. 충남 아산에서 나고 자란 16살짜리 '촌놈'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느니 내 장사를 하겠다'며 서울행 기차에 올라탄 건 1940년이었다. 첫 직업은 도매상에서 약을 떼어다 시내 약방에 되파는 중개인이었다. 근면했던 이 회장은 이내 유능한 '약장수'로 성장했고,1955년 부도가 난 고려은단의 경영을 맡으며 제약업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당시 고려은단 오너였던 외사촌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 대신 출자전환을 통해 주요 주주로 경영에 참여하게 된 것.

경영자로 변신한 이 회장은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승부를 걸었다. 은단의 대명사로 통하는 '정력은단(精力銀丹)'은 그가 일본 은단회사를 견학할 때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내부 연구인력과 함께 만든 제품이었다. 하지만 은단을 처음 본 소비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소싯적 약장수 생활을 하며 익힌 이 회장의 '장사꾼 기질'이 절실했던 시점.그는 배낭에 은단을 가득 채워놓고 시내버스와 전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마포종점' 노래를 불렀다. 이어지는 홍보멘트."문화인의 상비약 정력은단이 왔습니다. 중요한 손님을 만날 때나 애인을 만날 때 사용하시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

이 회장의 '버스 영업'은 장안의 화제가 됐고 매출은 급격하게 늘었다. 스러져가던 고려은단은 이 회장의 덕분에 회생하게 됐지만,정작 이 회장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사 확장 과정에서 불거진 다른 경영진과의 마찰이 원인이었다.

1957년 새 출발을 결심한 이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염색약 제조업체인 쌍용제작소였다. 이 회사 역시 경영진 간의 갈등 탓에 부도 직전에 놓인 상태였다. 회사를 거의 줍다시피 인수한 이 회장은 사명을 동성제약으로 바꾼 뒤 새로운 염색약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끓일 필요없이 바로 물에 타서 사용하는 염색약인 '양귀비1호'(1965년)와 컬러 염색약 '훼미닌'(1968년)은 동성제약이 국내 최초로 선보인 신개념 제품들이었다. 동성제약은 이 두 제품을 앞세워 이내 염색약 시장의 최강자로 올라서게 된다.

이즈음 이 회장의 별명은 '바닷가재'였다. 좋은 사업기회를 잡으면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정로환 제조비법을 얻는 과정이 바로 그랬다. 다이코신약에 건넨 '정로환 기술 제휴' 제안은 보기 좋게 퇴짜맞았지만,이 회장은 포기하는 대신 은퇴한 전임 공장장을 찾아나섰다. 70대 노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정로환처럼 좋은 약을 한국인들도 복용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읍소했다. 전임 공장장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나는 평생 일만 해왔소.도쿄 유곽에 한번 데려다주면 원하는 것을 주겠소."일주일후 도쿄 유곽에서 나온 전임 공장장은 기다리고 있던 이 회장에게 정로환 제조법이 자세히 적힌 문서를 건넸다.

승승장구하던 동성제약에 3남 이양구 사장(47)이 합류한 시점은 노사분규가 극에 달했던 1989년이었다. 집 앞에 진을 친 노조원들의 격한 항의를 듣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과 처량함을 읽은 것.이 사장은 그 길로 6년동안 준비했던 사법고시를 때려치우고,기흥공장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동성제약의 실무경영은 1983년 대표로 취임한 큰 형(55 · 이긍구 전 사장)이 맡고 있었다. 의대를 나온 둘째 형(53 · 이상구 서울아산병원 교수)은 회사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3남의 합류는 어느덧 '늙은 회사'가 돼버린 동성제약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 사장은 "당시 동성제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임직원 모두가 매너리즘에 빠져 새로운 도전을 꺼리는 것이었다"며 "'성인병'을 앓고있던 동성제약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 혁신에 온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혁신작업은 이 사장이 2001년 큰 형의 뒤를 이어 동성제약 대표로 취임하면서 본격화됐다. 주요 경영진을 교체하는 인적 쇄신과 함께 유휴자산 매각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시킨 것.전문의약품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등 사업구조도 다각화했다. 취임초 400억원 수준이던 매출은 지난해 622억원으로 불어났다. 올해 목표는 720억원 안팎.

이 사장은 "국내 염색약 시장이 포화상태인 만큼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할 계획"이라며 "해외 제약 벤처기업들이 개발중인 신약 후보물질에 투자해 국내에 도입하는 전략도 병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