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역술인들이 점술의 조사(祖師)로 떠받드는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 북송(北宋)의 소옹(邵雍 · 1011~1077년)이다. 사후에 강절(康節)이라는 시호를 받아서 통상 소강절로 불린다. 그는 주역 3000년의 역사를 통틀어 이를 마스터한 몇 안 되는 대가로 공자와 함께 꼽힐 뿐만 아니라 예지력이 매우 영험해서 '귀신 잡는 소강절,세상 일을 다 아는 소강절'로 더 유명하다. 너무 아는 체하는 사람더러 "저 놈은 소강절 똥구멍에다 움막을 짓고 사는가 보다"고 핀잔을 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런 점술의 달인을 유교에서는 성현으로 받든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척하는 유교 정신에 비춰 보면 이채로운 일이지만 소옹은 도학(道學),즉 주자학의 개조 주돈이와 함께 도통을 잇는 북송오자(北宋五子)의 한 명이다. 주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수리(數理) 철학으로 발전시켰다는 설명인데 주자학의 주체 세력을 이루는 구법당의 사마광,이정자(二程子) 형제와 절친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확실히 소옹은 유가와는 거리가 있는 도가의 풍모가 물씬했다. 젊은 시절 《하도(河圖)》 《낙서(洛書)》 같은 예언서를 전수받고 그 핵심과 숨은 뜻을 터득한 뒤부터는 관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스스로 세상 이치와 하늘의 뜻(天機)을 가지고 놀았다.

"소옹의 학문은 고명(高明)한 경지에 마음을 놀리며 천지와 음양의 변화성쇠를 관찰하여 만물의 변화에 통달했다. 만물의 수리(數理)에 정통해서 앞일을 예견함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 ―《십팔사략》

소옹의 신통한 예견 가운데는 왕안석의 신법 개혁과 관련된 두 가지가 유명하다.

"소옹이 낙양의 천진교 위에 섰다가 두견이 우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2년 안에 남쪽 사람이 급부상해서 재상이 될 것인데,이때부터 세상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 연유를 묻자 '태평시에는 땅의 기운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지만,변란시에는 반대다. 지금 남쪽의 기운이 북쪽에 다다른 것을 새가 먼저 알았으니,다리 위에서 두견새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고 했다. 과연 장시(江西) 사람 왕안석이 등장해 신법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

"왕안석이 실각하고 추종자인 여혜경이 집권했다. 구법당 사람들이 보복당할 것을 걱정하자 소옹이 말했다. '왕과 여는 형세의 이익이 맞아떨어져서 결합한 것뿐이다. 형세가 맞서면 저절로 원수지간이 될 것이니,다른 사람을 해칠 여가가 없을 것이다 .' 얼마 안 있어 여는 과연 왕을 배반했다. " ―《송원학안(宋元學案)》

소옹은 환갑을 넘기자 은사(隱士)의 복장을 하고 반(半) 신선처럼 생활했다. 그가 썼다고 하지만 후세에 가탁한 것으로 보이는 《철판신수(鐵板神數)》나 《매화역수(梅花易數)》 같은 역술서에 전하는 숱한 일화들은 대부분 이런 신비감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22년 연하이지만 친구로 지낸 정이천(程伊川)은 이런 그를 비루하고 조야(粗野)한 잡술을 농한다고 못마땅해하면서 그의 학문을 전수받는 것도 거절했다. 그런 그도 소옹의 신통력만큼은 이렇게 인정했다.

"그 마음이 허허롭고 밝았으므로,앞일을 능히 알 수 있었다(其心虛明,自能知之)."―《송사 도학전(道學傳)》

중국은 해방 이후 점술을 대대적으로 금지했지만,점술에 기대는 인민의 믿음은 여전하다. 최근 광저우의 한 신문이 뇌물을 먹고 들통 난 부패 공무원들의 사례를 보도했는데,그 중 '자수하라'는 점술가의 말을 믿고 자진 신고했다는 사연이 압권이다. 황당하지만,미련하게도 점술의 권위에 복종하는 우직함이 귀엽기도 하다.

공자는 "어떤 일이 발생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 조짐이 먼저 나타난다(有物將至,其兆必先)"고 했다. 소옹이 읽은 것도 조짐일 테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조짐이라면 무조건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꼭 닥쳐서야 깨닫고 해 보고서야 아는 것이다. 이런 우둔한 이들을 위해서 역사는 계속 쓰여지고 있는 것인데,이들일수록 역사를 안 읽는다는 것이 문제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