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사이드] 적어도 탈 많아도 탈 '외환보유액'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일고 있다. 지난해 각종 경제위기설이 나돌았을 때 외환보유액이 혹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서 논란이 제기됐는데,이번에는 위기가 수그러든 상황에서 향후 위기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외환보유액을 얼마나 쌓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발단은 정부 관계자와 경제연구기관 소속 일부 전문가의 외환보유액을 늘려야 한다는 발언이다.

올 들어 외환보유액이 꾸준히 증가해 5월 말 2267억7000만달러까지 늘어났지만 외환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외환보유액 확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제윤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은 지난달 28일 한국선진화포럼 주최 토론회에서 "국내 은행의 외채 규모를 줄이기는 어렵다"며 "경상수지 흑자를 이어가고 이렇게 해서 생긴 외화를 매입해 외환보유액을 확충하는 것이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는 현실적인 길"이라고 말했다. 김태준 한국금융연구원장도 같은 행사에서 "세계 금융위기는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며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외환보유액을 지금보다 1000억달러 이상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금의 외환보유액이 적은 것은 아니며 외환보유액을 더 늘리려다 보면 통화안정증권(통안증권) 발행으로 인한 이자 부담이 생기고 국제적으로 '환율조작국'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등 부작용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적정 외환보유액은 얼마?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은 한 나라의 3개월치 상품 수입액을 적정 외환보유액으로 보는 것이다. 이 정도 외화를 갖고 있으면 비상시에도 정상적으로 무역을 하면서 경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방법은 국가 간 자본 거래가 늘어나면서 유용성이 떨어졌다. 상품 거래보다는 금융 부문의 급격한 자본 유출에 의해 금융 시스템이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진 때문이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와 중남미 국가들은 3개월치 수입액에 해당하는 외화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외화자본 이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후 적정 외환보유액을 산출하는 기준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는 유동외채 대비 외환보유액이다. 유동외채는 1년 이내에 갚아야 할 단기 외채를 뜻한다. 외채의 만기 연장이 어려워지고 해외로부터의 외화 차입이 막히는 최악의 경우에도 1년 내에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를 갚을 정도로 외화를 갖고 있으면 지급 불능 상태를 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것보다도 훨씬 보수적인 기준은 3개월치 상품수입액과 유동외채,여기에다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의 3분의 1 정도를 더한 것이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나타났듯이 위기가 발생하면 주식시장에서도 외국인 투자금이 대거 이탈하므로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보수적 기준 적용 시 3000억달러 필요

외환보유액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현재의 외환보유액이 3개월치 수입액이나 유동외채 규모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충분하지만 보수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모자라기 때문이다.

3월 말 외환보유액은 2063억달러로 같은 시점의 3개월치 수입액(699억달러)이나 유동외채 규모(1858억달러)보다는 많다. 그러나 3개월치 수입액과 유동외채를 합친 것에는 모자란다. 여기에다 외국인 주식투자금의 3분의 1까지 더하면 2959억달러가 돼 외환보유액을 1000억달러가량 더 쌓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외 변수에 취약한 한국 경제의 특수성까지 감안하면 적정 규모 이상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어야 '9월 위기설'이나 '3월 위기설'과 같은 위기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경험했듯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외환보유액이 충분한데도 외국에서는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며 "불안 심리가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외환보유액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단기 외채 등 위험 요인부터 줄여야
[뉴스 인사이드] 적어도 탈 많아도 탈 '외환보유액'
문제는 외환보유액을 늘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다.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늘리기 위해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면 시중에 그만큼 원화가 풀려 통화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한은은 달러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풀려나간 통화를 흡수하기 위해 통안증권을 발행해야 하고 이에 따른 이자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통안증권 발행이 늘어나면 채권시장에 물량 부담을 일으키면서 금리 상승(채권 가격 하락)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한은 입장에서는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다. 하근철 한은 국제기획팀 차장은 "앞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돼 외환시장에 달러 공급이 늘어나면 통화당국이 이 중 일부를 흡수하면서 외환보유액은 늘어나게 돼 있다"며 "인위적으로 외환보유액을 늘리려다 보면 오히려 시장 안정을 해칠 수 있다"고 밝혔다.

무리하게 외환보유액을 늘리려 할 경우 대외적으로 '환율조작국'의 오명을 쓸 수도 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리 입장에서는 위기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쌓는 것이라 하더라도 외국에서 보기에는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조작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은행권의 단기 외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다른 시장 안정 수단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허창수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외환보유액 확대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라며 "국내 은행의 차입 구조를 장기화하고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외환시장의 불안 요인을 줄이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