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현 <상명대 교수ㆍ금융 보험학>

퇴직급여란 근로자들이 임금의 일부를 노후를 위해 은퇴 이후로 미뤄놓은 돈이다. 그런데 근로자의 퇴직급여인 퇴직금이 대부분 실제로 적립돼 있는 것이 아니고 장부에만 기록돼 있다.

결국 기업이 근로자의 돈을 무상으로 빌려 쓴 셈이고,이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문을 닫을 때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물론 기업이 보험이나 신탁으로 금융회사에 사외적립하는 퇴직보험제도가 있으나,주로 대기업이 가입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근로자 스스로도 수급권을 약화시켜 왔는데,중간정산을 받아 주택자금이나 생활비로 쓰거나,퇴직금을 무리한 투자로 날리는 등 노후소득을 소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진국에서는 기업이 근로자의 퇴직급여를 사외적립하고,근로자는 은퇴 후 이를 연금으로 받아 안정된 노후를 보내는 퇴직연금제도가 19세기부터 있어 왔다. 퇴직연금의 장점은 근로자들이 일을 하는 한 임금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저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퇴직연금은 근로자에게 경제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근로자들은 자금이나 지식이 부족해 성장의 과실이 분배되는 자본시장에 직접 참여하기 어렵다. 그런데 선진국에서는 퇴직연금기금들이 자본시장에 참여해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대신 투자수익을 올린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노후보장시스템이 퇴직연금을 중심으로 짜여 있으며,서유럽 국가에서는 퇴직연금이 공적연금을 보완하면서 노후소득의 10~50%를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05년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했다. 우리 제도는 기업이 최소 퇴직금 수준의 퇴직급여를 사외적립해 제공하는 확정급여형과 1년에 최소 한 달치 임금을 근로자의 계좌에 납입하면 근로자가 운용하는 확정기여형으로 나뉜다. 그런데 제도가 도입된 지 3년6개월이 지났는데도 실적이 가입률 10% 미만,적립금 7조원에 머물러 당초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여기에는 기업의 부담,근로자의 불안감,제도의 미비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은 사외적립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퇴직급여보장 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노사간 신뢰회복을 위해서라도 퇴직연금제도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한편 노조에서는 수급권 강화를 위해 산별퇴직연금기금이나 지급보장제도의 도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산별기금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와 노사안정이 이뤄져야 하며,기업 파산시 퇴직연금을 대신 지급하는 지급보장제도는 자칫 부실기업의 책임을 우량기업에 전가할 수 있다.

퇴직연금제도 자체도 미흡한 점이 많다. 예컨대 4인 이하 사업장을 위한 제도나 소형사업장들이 함께 가입하는 연합형 제도가 없다. 또한 근로자가 확정급여형 또는 확정기여형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며,중간정산제도가 묵인되고 있다.

우리 퇴직연금제도가 이처럼 보완할 점이 많은 것은 오랜 기간 다듬어진 선진국제도와 달리 정부 주도로 단기에 도입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해 지난 연말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물론 법 개정안은 4인 이하 사업장에 대한 퇴직연금제도,중소형 기업을 위한 연합형 제도,엄격한 중간정산 제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100년 걸려 정착된 제도를 단시일내 정착시키겠다는 건 지나친 기대다. 다만 산별기금이나 지급보장제도와 같이 사회적 영향이 큰 분야는 신중하게 다뤄야 하지만,그렇지 않은 부분은 적극 개선해야 한다. 더욱이 내년이면 퇴직보험은 손비인정이 종료됨에 따라 소멸될 예정이다. 따라서 24조원에 달하는 퇴직보험적립금이 중간정산으로 소진되지 않고 퇴직연금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이번 6월 임시국회에서 관련법 개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