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하나. 글로벌 경기침체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던 올 초 투자 · 고용 · 사회공헌을 줄이지 않겠다는 '3불 선언'으로 재계를 놀라게 한 기업이 있다. 경쟁업체들이 직원을 해고할 때 고용을 보장하고 추가로 사람을 더 뽑았다.

위기 앞에서 몸집을 줄이며 '태풍'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대부분 기업들과 달리 '경기침체기에는 우수한 인력들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역(逆)발상 전략을 밀어붙였다. 핵심 사업에 대한 투자전략도 마찬가지였다. 구조조정 전문 컨설턴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경영 전략이었다. 이 기업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경쟁업체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급감한 지난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되레 늘어났고 주력 제품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 순위도 높아졌다. 이 미스터리한 기업의 이름은 LG다.



주목받는 '구본무 매직'

실물경기가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LG그룹이 약진을 거듭하며 재계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소니,노키아 등 글로벌 경쟁사들이 지난 1분기 20% 이상 매출이 줄어든 것과 정반대로 전자 · 화학을 주력으로 하는 LG그룹은 같은 기간 매출이 27조7000억원에 달하며 작년 동기대비 6% 늘어났다. 영업이익도 견조했다. LG전자의 1분기 영업이익은 4500억원으로 1000억원에 그쳤던 지난해 4분기의 4배가 넘었다. LG화학과 LG텔레콤도 각각 4800억원과 14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단지 매출과 이익만 늘어난 게 아니다. 주력 제품의 글로벌 시장 순위가 일제히 '퀀텀 점프(대도약)'를 하며 세계 경쟁자들을 놀라게 했다. LG전자는 지난해까지 글로벌 시장 3~4위권을 맴돌던 TV 부문에서 1분기 중 13.3%의 점유율을 기록,'넘지 못할 벽'으로 여겨졌던 소니(13.1%)를 제치고 2위에 올랐다. 휴대폰에서도 모토로라,소니에릭슨과의 격차를 벌리며 노키아와 삼성전자에 이어 안정적인 3위에 랭크됐다.

업계에서는 LG가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한다. 위기를 장기적 안목으로 정면 돌파하는 구본무 회장의 리더십과 안정적인 기업 지배구조가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여기에 정교한 글로벌 브랜드 전략,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고객을 존중하는 기업문화 등이 더해졌다.

'퀀텀 점프'를 꿈꾼다

구 회장은 경기 침체 우려가 전 산업계에 번졌던 올해 초 '3불(不) 원칙'을 천명했다. 계열사 CEO들에게는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직원들을 내보내지 말 것"을 주문했다. 구 회장의 약속은 임직원들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LG전자의 구미공장에서 TV 부문 R&D를 맡고 있는 한 간부는 "15년 몸담아온 회사에 올해만큼 강한 애착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올해 초 그룹 인사에서 모든 계열사의 CEO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기존 CEO들이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뚝심있게 경영에 집중할 수 있게 함으로써 혼란을 최소화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구 회장의 '매직'이 임직원들의 위기의식을 고취시켰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경쟁업체들이 수만 명의 직원을 해고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 없이 살아남으려면 이전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임직원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게 됐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들 중 상당수가 투자를 줄이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단기적인 불경기 처방을 내린 데 비해 LG는 투자와 고용을 줄이지 않는 원칙에 입각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불황 극복 해법을 선택했다"며 "구조조정 후유증에서 자유로운 LG는 경기가 회복된 이후 더 빛을 발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에만 전념하면 된다"

안정적인 지주회사 시스템과 외환위기 이후 전통으로 자리잡은 계열사별 책임경영도 LG를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업으로 만든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LG는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을 때 지주회사 체제 전환이라는 '대수술'을 선택했다. 67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하고 튼튼한 수익구조를 갖춘 7개 미공개 우량 계열사를 상장시켰다. 경영 방식도 이 시점부터 투명하게 바뀌었다. 대주주는 지주회사 주식을 안정적으로 소유하고 지주회사는 자회사에 대한 출자와 전체적인 사업포트폴리오 관리,자회사 CEO에 대한 인사만을 담당하게 됐다.

여기에 창의와 자율을 존중하는 인간존중의 기업문화와 글로벌 시장에서의 브랜드 강화 전략 등이 더해지면서 LG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