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박3일 올빼미 해외 출장…30시간 연속 워크숍…한겨울에 여름 양복.'

지난 3월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런던을 3일 만에 다녀왔다. 이명박 대통령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세계적 에너지 개발회사인 AMEC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런던 체류 기간은 단 16시간.새벽 5시30분 도착해서 그날 밤 9시 비행기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간단히 샤워만 한 뒤 협약식에 참석하고 현지 지점을 둘러본 뒤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1등석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으냐 물었더니 "비즈니스석을 타고 다녀왔다"고 민 행장은 말했다. 투자은행(IB) 출신답게 분초를 다투며 일하는 그에게 미주와 유럽을 무박 3일로 다녀오는 출장은 다반사다.

민 행장의 정열적인 경영 스타일을 보여 주는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2월27일 은행 전 경영진과 부서장이 참석한 경영계획 수립 워크숍.금요일 오전 시작한 워크숍은 다음날 오후에 끝이 났다.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밤을 새워 장장 30시간 넘게 진행된 워크숍은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나지 않으면서 적당히 끝낼 수 없다'는 민 행장의 경영 원칙을 그대로 보여 줬다. 인사말만 하고 미리 짜여진 결론대로 서너 시간 동안 진행되는 회의를 지켜본 뒤 총평을 하는 식의 워크숍은 체질상 맞지도 않지만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통상적인 보고도 본부장과 팀장은 물론 실무 과장까지 한꺼번에 불러 토론 식으로 진행한다. 문서보다는 간략한 구두 보고와 질의,응답으로 핵심을 찔러 그 자리에서 바로 결론을 내는 식이다.

민 행장은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본인 스스로 "한겨울에도 여름 양복을 입을 정도로 열이 많다"고 말할 정도다. 열정으로 가득찬 맹렬 CEO이자 한번 정한 목표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 끝내 돌파구를 찾아 내는 뚝심의 CEO이기도 하다.

그가 리먼브러더스에 있는 동안 한국전력의 모든 딜(deal)을 리먼이 100% 독점했다. 임석정 JP모건 서울지점 대표는 "당시 한전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해외 채권을 발행하던 회사여서 다른 IB들이 엄청나게 눈독을 들였지만 결국 리먼에 손을 들었다"면서 "나중에 '한전에서 요구한 모든 사항을 단 한번도 어기지 않았던 게 비결이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임시 국회에서 통과된 산업은행 민영화법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을 맨 투 맨으로 만나서 설득한 결과다. 지난해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은행 내부에서조차 산은 민영화는 '물건너 갔다'는 인식이 팽배했지만 이 같은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최근 마무리된 대기업 구조조정에서는 대기업 회장과 직접 만나 핵심 자산을 넘기면 나중에 경영권을 되찾을 기회를 주겠다며 담판을 짓기도 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저돌적인 경영 스타일은 지난해 6월 취임 초기 그간의 보수적인 문화에 젖어 있던 산은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민영화가 성공하려면 내부 조직 문화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취임 다음날 본점 부서장들을 소집해 화이트 보드에 산은 민영화 로드맵을 그려 가며 두 시간 동안 특강을 벌였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민 행장은 "지금까지는 산은 직원이 '농사꾼'이었다면 앞으로는 '사냥꾼'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씨를 뿌리고 거름 주고 작물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자세로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편안히 앉아서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먹이를 찾아 나서는 사냥꾼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스스로도 "직원들을 하도 많이 '조져서' 인기가 없다"고 말할 정도다. 본인도 강행군하지만 그만큼 따라오기를 기대하며 직원들을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 덕장은 필요 없다는 식이다. 민 행장이 즐겨 부르는 18번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그의 공격적인 성향은 어릴 때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선친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중학교 때부터 가정교사와 우유 배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서강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친구와 오퍼상을 차리기도 했다. 한때 상당히 돈을 벌었지만 실패로 빚을 다 갚지 못해 군 제대 후 가정교사를 하면서 남은 빚을 청산한 경험도 있다.

경기고 시절에는 등산에 빠져 15박16일 동안 산행을 다니기도 했다. 설악산에서는 한 달간 혼자 야영하다가 공비로 오인받아 군 수색대에 끌려가서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운동도 유도와 같은 격투기를 좋아한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과 몸을 부딪치며 뒹굴고 승패를 가리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스스로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씨티,자딘 플레밍,모건스탠리,살로먼 스미스바니,리먼브러더스 등 외국계 IB로 회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한번도 이력서를 작성한 적이 없다. 구직 신청한 경험도 없다. 모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배짱을 부리면서 연봉 협상을 했다. 그가 대폭적인 연봉 삭감을 감내하고 자리를 옮긴 경우는 우리금융지주 부회장과 산업은행장 두 번이다. 좋은 거래를 성사시켜도 결국 외국 주주들의 이익을 위한 것 아닌가 하는 정체성의 고민을 안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산업은행장으로 오면서 캐나다 국적을 포기했다.

민 행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탓에 가끔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위태위태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 인수 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퇴론이 일었지만 "위험을 빼고 유리한 조건으로 인수하려 했다"면서 "할일을 했을 뿐"이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구시대를 상징하던 '산업은행 총재' 직함에서 총재를 떼어 버리고 '은행장'으로 내려왔지만 오는 9월 지주회사 체제로 재탄생하는 산은의 대역사를 성큼성큼 써내려 가고 있다. 온몸을 IB의 DNA로 무장한 민 행장이 산은을 글로벌 기업금융투자은행(CIB)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