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獨 '학생결투' 명예 때문?…실상은 경력관리 수단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9세기말 독일 대학문화
미국인 의사 로드니 글리슨(Rodney Glisan · 1827~1890)은 유럽에서 2년간 유학을 마친 후 1887년 발간한 여행기에서 "독일 대학생들 대부분은 맥주 마시고 노래 부르고 강아지 키우고 결투하는 것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비꼬았다. 19세기 후반 독일이 학문과 과학의 세계적인 중심지였고 그 배경에는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은 22개 연구중심 대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글리슨의 관찰은 일견 지나친 혹평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결핵 균을 발견한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에서 항암 화약요법을 개발한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그리고 1905년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독일 학자들의 업적은 노벨상을 싹쓸이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책가방이 크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듯,뛰어난 교수와 훌륭한 시설이 있다고 해서 1차대전 발발 전 6만명이나 되었던 독일 대학생들이 모두 학문에 열정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오산이다. 글리슨과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식물학을 공부했던 일본인 마쓰무라 진조 또한 이토록 나태한 독일 학생들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학자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해했고,1892년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던 하버드 최초의 흑인 박사 두 보이스(W.E.B.Du Bois)는 학문의 피난처라 불릴 수 있는 독일 대학의 주인 독일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에 실망감을 표시했으니 말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도 있는 글리슨의 독일 대학생에 대한 평가는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맥주 마시고 노래 부르는 것이야 대학이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되는 현상이라 따로 논의할 것이 없겠지만,결투라니.서부활극 시대도 아니고 도대체 독일 대학생들은 무슨 이유로 결투에 열광했을까.
우선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학생 결투는 총을 사용해서 단판에 승부를 짓는 일반적인 결투와 그 방식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측정하다'라는 라틴어 단어 멘수라(mensura)에서 유래한 학생 결투 멘주르(Mensur)는 중세 후기 프랑스와 이탈리아 대학들의 펜싱 경기에서 유래해 16세기 후반 독일 전역에 퍼져 나갔는데,원래는 래이피어(rapier)라는 가늘고 날카로운 장검을 사용했으나 폐에 구멍을 내는 치명상으로 죽는 학생 숫자가 늘어나자 19세기 후반에 가서는 끝이 뭉툭한 슐레거(schlaeger)라는 검과 가죽으로 된 각종 보호 장비를 사용하게 된다.
칼끝이 무디어지고 보호 장비를 사용한다고 해서 학생 결투가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독일 대학생들에게 큰 모욕일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생 결투를 목격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처럼,학생 결투는 번개와 같이 빠른 속도로 타격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는데,중간에 칼이 부러지거나 상처가 나서 치료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격투 시간 그 자체만 15분 이상 지속되어야 한 경기가 완료된다. 다시 말하면 최소 300번 정도의 타격을 주고받고 많으면 800번을 때리며 같은 수만큼 칼을 맞아야 한숨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총을 사용하는 결투처럼 현장에서 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더라도 학생 결투 후 수일 혹은 수주 후에 패혈증으로 죽는 숫자는 상당했으며,1876년 괴팅겐의 한 학생의 경우 두개골이 파열되어 사망할 정도로 학생 결투는 폭력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폭력적인 학생 결투를 독일 대학생들은 왜 결투단까지 만들어 가면서 열심히 연습했을까. 역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 결투가 강한 남성성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학생 결투의 달인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진정한 남자로 태어나는 데 학생 결투는 아주 중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했고,황제 빌헬름 2세 또한 학생 결투가 독일 국민의 덕성이라고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기르는 최고의 방식임을 당당하게 선포했다.
용기와 명예가 독일 남성이 갖춰야 할 고상한 덕목이었다면 이성을 유혹하는 매력은 학생 결투가 주는 적지 않은 부산물이었다. 학생 결투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슈미스(Schmiss)라 불리는 안면 자상 흉터를 가지게 되는데,독일 대학생들은 의술의 발달로 쉽게 고칠 수 있었던 가벼운 상처를 심하게 문지르거나 와인을 들이부어 덧나게 해서 눈에 확 띄는 큰 흉터로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면 흉터는 능력 있고,연줄이 좋고,신분도 좋은,한마디로 멋진 신랑감이 될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을 여자들에게 자연스레 보여 줄 수 있는 영광의 상처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 학생은 1894년 의사에게 안면 흉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가 언론을 타게 되었고,1902년에는 10대 학생이 면도기로 흉터를 만들려다가 실패해 국민들을 웃게 했다.
독일판 성형 수술 붐까지 가져온 학생 결투의 가장 직접적인 동인은 그러나 현실적인 출세욕이었다. 독일의 정치인,관료,의사,변호사 대부분이 학생결투단을 거쳐간 사람들이었기에 각 대학마다 여러 개 존재했던 학생결투단원이 되는 것은 출세의 보증 수표였다. 학생 결투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책 한 줄 더 보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자기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기에 독일 대학생들은 한 번이라도 더 맞붙기 위해서 고의로 건수를 만들 정도였다. 일례로 저명한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는 길을 지나다 소매 깃이 스쳤다는 이유로 대학생으로부터 학생 결투 신청을 받았으니 말이다.
20명 남짓한 학생들이 공동 생활을 했던 전형적인 학생결투단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에 오전에는 펜싱 연습,오후에는 독특한 유니폼을 입은 채 산책을 나가고,저녁엔 이런저런 술자리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참 한심해 보이는 이런 대학 생활이 실은 가장 현실적인 경력 관리였다는 것을 글리슨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김회은 <텍사스A&M대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