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4학년생인 박승필씨(25 · 영문)는 요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졸업 논문 준비로 바쁜 데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부친의 양복점 '엘부림(Elburim)'에서 일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제대하고 복학한 2년 전부터 부친의 뒤를 이어 양복점을 운영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어릴 때부터 영어 선생님을 꿈꿔왔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양복점들이 백화점 등에 밀려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양복점'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습니다. "

지금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박씨는 '교육자'도 좋지만 부친이 40여년 동안 지켜온 양복점을 키우는 게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씨가 가게일을 거들면서 엘부림은 변모하고 있다. 매장은 뒷골목에서 대로변으로 옮겨왔고,상호도 '부림양복점'에서 '엘부림'으로 바꿨다. 이들 부자는 백화점에서 한 벌에 100만~200만원씩 하는 브랜드 양복을 절반 이하 가격으로 제공하는 '맞춤 양복'을 내세우고 있다. 박씨는 "각종 기능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부친의 기술을 전수받고,마케팅을 제대로 하면 승산이 있다"며 "매장을 키워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설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불황으로 자영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박씨 같은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서울 광장동의 유명한 토종 묵전문점 '도토리마을'의 서보건(33) · 서보균씨(31) 형제도 그런 사람들이다. 치대를 졸업한 형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2007년 모친이 운영하던 도토리마을을 이어받아 묵을 팔고 있다. 무역학을 전공한 동생도 연봉 6000만원이 넘는 증권사를 그만두고 작년 가을 경기도 구리에 '도토리마을' 분점을 냈다. 서보균 사장은 "20년 이상 어머니 가게를 찾는 단골들을 보면서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며 "샐러리맨보다 '수입'도 많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유럽이나 일본 등 자본주의 역사가 우리보다 오래된 선진국에서는 대를 이어 자영업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이웃나라 일본에선 도쿄대 등 명문대를 나와 4~5평짜리 우동집이나 라멘집을 물려받는 사례는 얘깃거리도 안 된다. 이에 비해 화이트칼라를 선호해 온 우리나라에선 '장사'하는 것을 그리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불황 탓도 있지만 최근 젊은이들의 의식이 실용적으로 바뀌면서 국내 자영업시장도 조금씩 달라지는 양상이다. 자영업이나 중소기업에 젊은 엘리트들이 많이 진출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일본 사회가 안정돼 있고,하이브리드카 등 하이테크산업에서 여전히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각 분야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1년 사이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자들이 30여만명이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580여만명에 달하는 자영업자는 한국 사회의 기둥이다. 이들이 흔들리면 사회 안정을 담보하기 어렵다. 정부는 대책을 서둘러야 하고,자영업자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모친의 뒤를 이어 46년째 한정식집 '대림정'을 지켜온 남상만 한국음식업중앙회 회장은 "자식이 3대째 음식점을 하겠다면 기꺼이 동의할 것"이라며 "아무리 어렵다 해도 긍정적인 '사고'와 '끈기'를 가지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최인한 생활경제부 차장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