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스테인리스 유통업도 겸해…90년대 고급화 전략으로 유명세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으로 만든 그릇인 유기(놋그릇).이를 놓고 '변색이 잘 된다''녹이 잘 생겨 관리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경남 거창군 거창읍에 있는 거창유기공방에서 만난 이기홍 대표(55)는 "탄피 등 전쟁 물자를 사용해 품질이 나빴던 1950~60년대 제품과는 달리 최근 생산품들은 녹이 잘 슬지 않고 광도 잘 난다"고 설명했다.
유기는 이른바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방짜 유기'로 일컬어지는 단조 유기와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든 주물 유기로 구분된다. 거창유기공방은 1924년 설립돼 85년간 3대에 걸쳐 주물유기 제작 및 유통으로 한우물을 파 오며 전통 유기의 맥을 잇고 있다. 연간 매출은 약 10억원.2006년 영화 '음란서생'과 2007년 TV 드라마 '왕과 나'에 등장한 각종 유기 소품은 모두 이 회사가 만든 것들이다.
창업주인 김석이씨(1886년생,1954년 작고)는 집안이 어려워 걸식을 하다시피하다 우연히 유기주물 기술을 배우게 됐다. 김씨는 이를 밑천삼아 1924년 소규모 공방을 하나 열었다. 가게 이름도 따로 없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주문이 있을 때에만 혼자 물건을 만드는 식이었다. 솜씨가 좋은 데다 제기나 화로 및 수저,징이나 꽹과리 등은 꼭 필요한 물건이어서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이 대표의 아버지인 2대 이현호씨(1922년생,1995년 작고)는 4남1녀 중 셋째였다. 그는 열네 살 되던 1935년 김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 대표는 "아버지께서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 입이라도 하나 덜자는 심정으로 유기 기술을 배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41년 일제가 전쟁물자 공출을 목적으로 유기 제작 및 판매 금지령을 내리면서 공방은 위기를 맞는다. 제작 도구까지 몽땅 뺏겼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김씨는 동전을 밀주조해 쓰다가 붙잡혀 3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옥살이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결국 1954년 세상을 떴다. 이씨는 기술을 배우던 문하생 2명과 함께 공방을 승계해 1946년 거창유기라는 공방을 열었다. 이 대표는 "김씨 슬하에 6남매가 있었지만 아무도 공방을 하지 않으려고 해 아들처럼 여겼던 선친에게 공방을 물려 준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대 초 거창유기는 물건 잘 만든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직원도 10명으로 늘었다. 탄피 등 질 낮은 금속이 아닌 좋은 원료를 구해서 썼고 그릇 바닥에 '거창 이현호 제품'이라고 글씨를 새겨넣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품질보증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밥그릇 7개 정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돈벌이는 잘됐다. 이 대표는 "당시 시세로 놋쇠 밥그릇 한 벌이 쌀 한 가마 값이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중반에 공방은 또 한번 위기를 맞는다. 연탄이 가정 연료로 쓰이면서 연탄 가스로 인해 놋그릇이 쉽게 녹스는 데다가 스테인리스와 멜라민 등으로 만든 가벼운 식기가 나오면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해진 것.결국 1970년대 초 대부분의 유기공방이 문을 닫았고 회사도 비슷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씨는 결국 사업의 방향을 틀었다. 스테인리스 그릇 판매와 유기를 고물로 파는 유통 사업에 주력하면서도 불교 용품을 조금씩 만드는 등 유기 제작에서 손을 놓지는 않았다.
3남2녀 중 넷째였던 이 대표는 1972년 고등학교(거창농업고)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 실패하자 아버지 밑에서 그릇가게 운영을 도우며 틈틈이 유기기술을 익혔다. 그러던 1980년 이 대표는 그동안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아버지에게 유기공방을 다시 열겠다고 했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장사도 안되는 놋그릇을 만들어 뭐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시골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것으로는 비전이 없다고 판단해 사업을 결심한 것"이라며 "여러 차례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공방을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유기 수요가 거의 없어 이후 10년간 사업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 장사를 하면서 번 돈을 공방에 투자하는 꼴이었다. 이 대표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브랜드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다. 비닐이나 신문지에 말아서 팔던 유기를 회사 이름을 새긴 종이 박스에 담아 팔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에 힘입어 1억원도 안 되던 연 매출이 3억원까지 뛰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99년 화재가 발생,공방이 잿더미가 됐다. 약 2억원의 손해를 봤다. 친구,친지들이 십시일반 모아 준 돈으로 겨우 일어났는데 거짓말처럼 장사가 잘됐다. 이 대표는 "불이 나면 잘된다더니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물건이 잘 팔려 딱 3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업계 최초로 유기에 레이저를 이용한 글자 새김 기술을 도입,2002년 사업의 도약기를 맞는다. 부산의 한 냉면집에서 상호를 새긴 그릇을 납품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이전에는 유기에 글씨를 새기려면 끌로 파내야 했다. 이후 유기로는 이례적인 사각형 디자인에 레이저로 전통 문양을 새긴 그릇을 개발,2003년 전국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유명해진 데다가 웰빙 바람속에 놋그릇이 잘 팔려 2005년부터 매출이 약 10억원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약 15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2남1녀를 두고 있는 이 대표는 "자식 중 누가 가업을 물려받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꼭 대를 이어 주물 유기의 전통을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거창(경남)=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