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현대판 페트라르카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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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열고도 스스로는 의미몰라, 미디어법 '신세계' 관점서 해결해야
페트라르카(1304~1374년)는 최초의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아비뇽의 산타클라라 사원에서 라우라라는 여인을 처음 만난 뒤 그녀를 사랑하게 됐고 그로 인한 마음의 번뇌와 고통을 노래했다. 단테의 신곡을 뛰어넘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그의 노력은 계관시인의 영예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로마시대의 사람들이 남긴 저작을 읽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려고 했다. 페트라르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됐고,인간이 가진 무한한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를 가리켜 '근대세계의 첫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르러 세속적인 사랑과 명예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영혼의 타락이며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며 중세적 은둔사상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모세처럼,페트라르카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분이다.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을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쟁취됐다. 그런 마당에 최근 '독재'에 대한 그의 우려는 지난 세대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의 역사와 그것의 시대적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사회 곳곳에 튼튼히 뿌리내린 대한민국이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거슬러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치 또 하나의 페트라르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야가 공동으로 구성한 '미디어위'가 파행을 거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디어 관련 법안을 둘러싼 핵심 논점 중 하나는 대기업과 신문사의 방송참여 허용 여부다. 정부여당은 다양한 언론매체의 융합과 산업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기존의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대기업의 참여가 미디어산업의 국가 경쟁력을 제고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야당 측은 대기업의 방송 참여는 방송의 공익적 가치를 훼손시키고 재벌에 대한 언론의 감시기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나아가 메이저 신문사의 방송사 소유가 언론의 독과점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언뜻 보면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정치적 속셈이 숨어있다. 즉 여당은 원군인 신문의 영향력이 날로 수축돼가는 상황 속에서 방송과 뉴미디어의 영역에서 원군을 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 하고 있으며,야당은 그동안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방송과 인터넷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걸맞은 법과 제도를 갖추려는 진정성이다.
우리는 200년 전 산업혁명을 뛰어넘는 새로운 혁명의 중심에 서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원하는 정보를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이른바 유비쿼터스 혁명이다. 이러한 시대에 여론의 조작이나 독과점이 어찌 가능할 것인가. 논의의 핵심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맞는 미래지향적 제도가 무엇인지에 맞춰져야 한다. 신문사,방송사 간의 교차 소유 규제나 방송의 상업화 등에 관한 문제는 언론의 공공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합의하면 될 뿐이지 논의의 핵심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데 여전히 과거의 눈으로만 미디어를 바라본다면 현대판 페트라르카의 불행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