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청와대 보좌관 재직 시절 에피소드다. 한 · 중 정상회담이 끝났으나 공동성명의 문안정리가 늦어져 베이징으로 동행 취재간 기자들은 밤 10시가 지나서야 식당에 갈 수 있었다.

기자들의 늦은 저녁 자리에 그가 불쑥 합류했다. 손에는 평범한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국빈방문 중인데 공식만찬장에는 가지 않으시고 웬 샌드위치를…" "여러분도 이제사 밥 먹으며 수고하는데…, 환영만찬이라지만 별로 먹을 것도 없고 사실 피곤한 행사"라고 둘러댔다. 반 총장의 소탈한 성품이 잘 드러난 수년 전의 기억이다.

대통령의 움직임은 외교의 완성이다. 기자가 청와대를 출입할 때 대통령의 해외 공식 오찬 · 만찬장을 직접 보기도 했었고,다음 날쯤 뒷얘기도 적잖게 들었다. 의외로 실속 없는 경우도 많았다.

2004년 아르헨티나 방문 때도 그랬다. 흔히 세계 최고의 스테이크 재료가 아르헨티나산 송아지라 하는데 환영만찬에 갔던 지인의 참석담은 생뚱맞았다. "스테이크라고 나온 게 식어서 질기기만 하고…." 행사가 거창해지다 보니 참석자는 좀 많은가. 테이블마다 막 요리된 좋은 음식을 내기가 어디서인들 쉽지 않다. '스탄'계열의 중앙아시아국 방문 때는 평범하지 않은 메뉴로 인한 고생담도 들었다. "자기들 특별 요리라고 말고기를 내놨는데,도무지 손길이 가질 않아서…." 양국의 주요 초청인사들은 초면에 섞여 앉게 된다. 헤드테이블이 아니면 말도 잘 안 통한다. 편치 않은 자리라는 게 한결 같은 얘기였다.

역시 몇 년 전,우리 대통령이 영국을 국빈방문했을 때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국빈방문국을 매년 수개국으로 제한한다. 대신 대제국의 전통을 살려 성대히 환대한다. 꽉 짜여진 일정 중 런던시장의 공식 환영만찬도 있었다. "긴 가발까지 쓰고 격식갖춘 인사들이 줄줄이 나와 연설하고 건배하고 3시간이 걸렸다. " 한 참석자는 시차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지루했다고 했다. 그래서 대통령조차 종종 국빈만찬을 잘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라면을 끓여먹는다는 얘기도 들렸다. 이 라면은 대통령이 수행단이나 동행자에게 한턱 크게 내는 것이다.

국빈 오찬 · 만찬이 거창한 이름값만 못한 때가 많은데도 우리는 대통령이 어디 가서 제대로 대접받았는지를 특히 많이 따지는 것 같다. 실제로 외교적 성과가 어땠느냐에 대한 분석은 뒷전일 때도 많다. 가령 부시가(家)의 텍사스 목장에 안 갔다면 홀대받았다 한다. 캠프 데이비드 별장의 초대 여부가 방미 정상회담의 성패로 이어진다. 이젠 형식에서 벗어나 실리를 따질 때가 됐다. 국민들이 이런 점을 지나치게 의식하니 외교부와 청와대는 대통령이 대접 잘 받는 것처럼 하는 데 힘을 쏟을 수밖에….수천년 된 소국 콤플렉스는 아닐까.

이번 한 · 미 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이 크게 환대받았다고 한다. 외교가에선 회담 후 백악관에서 오찬 나눈 것에 의미를 두면서 특히 그렇게 강조한다. 우리 대통령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접을 받았다면 물론 잘된 일이다. 그러나 흔히 그런 오찬은 청구서가 뒤따를 수도 있다. 대개 은근하게 제시된다. 때로는 한참 뒤에,완전히 엉뚱한 분야에서도 나온다. 그래서 실은 그게 그때의 점심값인지 모를 수도 있다. 수천억원짜리일 수가 있다. 백악관서 스테이크 한번 먹고 수천억원짜리 청구서를 받게 된다면,그게 다 국민들 부담이다. 서양격언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