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인천에 남아있는 조계지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조계지는 제국주의 시대의 외국인 거주지를 뜻한다. 외국인들 스스로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했다는 그곳.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칭다오의 독일 조계지처럼 인천시 자유공원 일대엔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청나라와 일본 사람들이 거주촌을 형성하고 살던 이 곳의 도로와 건축물들이 식민지의 역사를 품고 있다.


◆너도나도 '한국 최초'라 불리는 곳

정오가 가까워올 무렵 지하철 1호선 인천역에 내렸다. 세계 어딜 가나 그렇듯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에도 '여기부터 중국인 마을 시작임'을 알리는 '패루'가 당당히 서 있다. 제1패루를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자장면의 고향.중국엔 있지도 않은 '한국식 중국요리' 자장면이 20세기 초 이곳에서 최초로 선보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인천 최고의 청요릿집인 '공화춘'은 폐허가 돼 흉물스럽게 남아있지만,'옛 공화춘'의 이름을 딴 새 음식점 공화춘이 자장면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자장면은 어딜 가서도 먹을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음식이지만 '원조'라 생각하니 맛이 색다르다. 주린 배를 채운 뒤 중국식 절 의선당도 들렀다.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이 절은 불교의 엄숙함과 도교의 자유분방함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본땅? 중국땅?

자유공원을 끼고 돌아 삼국지의 장면을 벽화로 그린 삼국지거리를 지났다. 공자상의 발 아래로 청 · 일 조계지 계단이 보인다. 이 계단을 중심으로 서쪽은 청나라,동쪽은 일본 조계지였다. 건축물의 모습과 느낌도 확연히 다르다. 왼쪽은 반듯반듯한 일본식 건물,오른쪽은 처마와 테라스를 지닌 청식 건물이다.

계단을 내려가 일본 쪽으로 향했다. 일본 제1은행,제18은행,제58은행은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건축물.여기가 한국이 맞나 싶다. 도심에서 흔히 보던 편의점이나 간판도 전혀 없어 낯설다. 지도가 없었다면 길을 잃고 헤맸을 터.제18은행은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주변 건축물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


◆서울 탑골공원보다 오래된 '자유공원'

자유공원에 올랐다. 지금도 조경 가꾸기가 한창인 이곳은 해발 69m 응봉산에 자리잡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서울 종로의 탑골공원보다 9년 앞선 1888년 조성됐다. 조계지에 청,일본,러시아,미국인 등이 살면서 처음엔 각국공원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 때 서공원으로 바뀌고 해방 후 만국공원으로 이름 불렸다. 그 후 1957년 맥아더 동상 설치를 기념하며 다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맥아더 동상의 오른쪽 발 아래를 끼고 돌면 멀리 개항장을 배경으로 옛 제물포구락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100년 만에 거대한 산업항구로 변한 인천 앞바다가 멀리서도 분주해 보인다. 100년 전 이곳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흥에 겨운 파티를 즐기다가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향수에 젖지 않았을까. 1901년 완공된 이 건물은 청 · 일 조계지와 공동 조계지(청 · 일 이외의 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쓰였다. 해방 후 주한미군 클럽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홍예문 지나 신포시장 먹자골목

자유공원2길로 돌아 내려가면 홍예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조계지에 뚫은 터널이다. 일본 사람들은 아나몽(穴門)이라고 불렀고,인천 사람들은 홍예문(무지개문)이라고 불렀다. 이국적인 내동 성공회성당을 지나 내려가면 신포시장이다. 신포우리만두와 쫄면의 고향인 이곳은 아직도 분식점이 많아 늦은 점심을 먹기 좋은 장소다. 신포시장은 20년 전통의 매콤한 닭강정으로도 유명하다. 주말엔 닭강정을 사먹으려고 장사진을 친다고 한다.


◆밀려난 한국인들의 거리 '배다리'

신포시장에서 지하도를 건너 답동성당 방향으로 걸었다. 개항로를 따라 7~8분 걷다가 경인선 다리를 지나면 배다리다. 개항 직후 외국인들은 인천항부터 응봉산까지 좋은 터를 잡아 살았고 한국인들은 내륙인 배다리로 밀려났다. 배다리에 다다르니 이국적 분위기는 간 데 없고 근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게 배다리 헌책방 골목.옹기종기 모여있는 서점은 이름부터가 정겹다. '아벨서점''사진책 도서관 함께 살기''시가 있는 작은 책길' 등이다. 헌책방 골목길 옆엔 근대건축물인 창영초등학교와 옛 양조장을 개조한 미술공간 '스페이스 빔'이 자리하고 있다. '폐허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이 곳은 전시보다 공간 자체가 말을 걸어온다.

개항기 역사들을 뒤로 하고 동인천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늘이 슬며시 붉어지고 있었다. 운 좋게도 용산행 급행열차에 올랐다. 겨우 30분 만에 서울의 익숙한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안도감에 마음이 놓인다. 경인선을 타고 내렸을 뿐인데 해외여행 다녀온 기분은 왜일까.

인천=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