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화와 투박한 목장갑,흙 묻은 바지,관절염.

숭례문 발굴팀장 최인화씨(28)의 오늘을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문화재청 소속 학예연구사로 온 국민이 주목하는 숭례문 발굴을 책임지고 있지만 아직은 꾸미고 싶은 욕구가 큰 청춘.그러나 최씨의 일상은 발굴 현장 곳곳을 누비며 흙구덩이에도 들어가고 땅바닥을 긁어야 하는 힘든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는 씩씩했다. "올해 나이가 서른이죠?"라는 질문에 "아니요. 만으로 스물여덟입니다. 하하하!"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대학까지 부산에서 마치고 문화재청에 들어온 것이 2004년.서울생활 5년째이지만 최씨는 대화 도중에 '내나(이전과 같이,여전히)'와 같은 부산 사투리를 섞어가며 자신의 일과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쏟아냈다.

무엇보다 그는 리더다.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부터 70대 후반의 어르신 인부까지 7~8명의 팀원을 거느리고 일하기가 만만치 않다. 때로는 다그치기도 하고 때론 회식 자리를 마련해 다독이기도 해야 한다. 현장보고서 작성에서 예산 관리까지 행정적인 일은 물론 복원팀 등 현장에 나와 있는 다른 팀과의 조율도 해야 한다. 날로 염천의 열기가 더해가는 숭례문 발굴 현장에서 최씨를 만났다.


▼긴 바지에 모자까지 쓰고 뙤약볕에서 일하려면 덥겠습니다.

"자외선에 피부가 많이 상하다 보니 할 수 없어요. 사진 촬영 때문에 문화재청 조끼를 입었지만 평상시에는 윗옷도 긴소매를 입습니다. 짧은 옷보다 후텁지근하지만 덥다고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으면 피부가 따가워요. 하루 8시간 동안 야외에서 일해야 하니까요. 선크림도 꼬박꼬박 발라주는데 보통 한 달에 한 통을 다 비우죠."


▼육체적으로도 힘들겠어요.

"쪼그리고 앉아서 오래 일하다 보니 최근 병원에서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의사 선생님이 '젊은 나이에 관절염이라니…'라며 혀를 차시더군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만 오래 일해도 무릎이 부어요. "


▼야외 작업이라 날씨에 신경을 많이 써야겠네요.

"비오는 날에는 경복궁에 있는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작성해요. 일이 힘들다 보니 여름에는 비오는 날을 기다릴 때도 있죠.그런데 작년 여름에는 정말 비가 적었어요. 지난해 초 숭례문 화재가 나고 8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는데 태풍 한번 없었고 비오는 날도 적었거든요. 그래서 발굴하는 사람들끼리 '지구 온난화라더니 정말 날씨가 이상해졌다'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죠.그러다 1차 발굴이 끝나가던 11월부터는 가을비,겨울비가 자주 와 일정에 지장을 주는 바람에 애가 탔고요. "


▼아직 젊은데 예쁜 옷을 입고 일하고 싶지 않나요.

"좀 아쉽기는 해요. 일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기는 하지만 피곤하다 보니 출퇴근도 간편한 복장으로 하거든요. 일주일에 한두 번 구두를 신고 싶은 날도 있는데 그러면 더 피곤하니까 참습니다. 일하면서 땀을 많이 흘려 화장도 진하게 못하죠.현장에 샤워실이 없어서 일이 끝나도 씻지를 못해요. 그래서 웬만하면 저녁 약속을 안 잡아요. (웃음) "


▼여성이 직업으로 고고학자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고고학과에 갔어요. 하지만 대학(부산대)에서 실제 발굴에 참여하며 토기 하나 하나,옛날 사람들이 쌓아올린 흙무더기 등을 손으로 만지며 발굴 작업에 희열을 느꼈죠.대학 시절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지금까지 발굴한 것 중 가장 오래된 논을 경남 밀양에서 발굴하며 직업으로서의 고고학을 생각하게 됐어요. "


▼여성 발굴팀장으로서 남성보다 나은 점이 있나요.

"(한참 생각하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요. 육체적인 작업이라 일하는 것도 그렇고,인부 어르신들을 통솔하는 것도 그렇고요. 발굴팀뿐만 아니라 다른 외부 기관과 협조를 해야 할 경우도 많은데 여자라고 무시하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가능하면 웃고 넘어가려 하지만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지면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해요. "


▼싸움을 잘 하시나 보죠.

"하하,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집에서든 밖에서든 싸운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몇번 주의를 줬는데도 다른 팀이나 외부인이 현장을 훼손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라며 고함을 지르고 뛰어가죠.성격이 좀 거칠어지고 남자 같아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


▼젊은 인턴이나 아르바이트생부터 나이 드신 인부들까지 팀 구성이 다양한데요. .

"팀원 간에 나이 차가 많아서 어려운 것은 사실이에요. 특히 일흔 넘은 어르신 인부한테 일을 시키려니 미안하고 불편하죠.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인턴,아르바이트생들과는 매일 저녁 하루 작업을 평가하고 다음 발굴 목표를 공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공유하면서 작업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은 그때마다 설명해 줍니다. "


▼현장을 이끌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는 점이 있나요.

"발굴 현장은 그야말로 '노가다판'이라 팀원들에게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있는데,특히 기록이나 보존을 소홀히 할 때 그래요. 발굴의 목적은 단순히 땅만 파는 게 아니니까요. 실측을 하고 사진도 찍는 등 발굴 과정에는 자칫 소홀하기 쉬운 작업이 많습니다. 하루 일이 끝나고 퇴근하기 전에 현장을 비닐 천막으로 제대로 덮지 않아 밤새 비로 훼손되는 경우도 있고요. 게으르거나 귀찮아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쓰는 편이죠."


▼지금 숭례문에서 진행하고 있는 발굴작업은 어떤 내용인가요.

"위엄 있던 숭례문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원래 숭례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고 권위 있는 건축물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묻혀 원래 높이보다 낮아졌어요. 축조 당시에 비해 1~1.5m 정도가 땅에 묻혀 있는 상태인데 원래의 지층을 찾아내 본래 높이대로 복원할 계획입니다. 발굴팀은 그 과정에서 인근 성곽과 민가의 흔적도 발굴하는 등 기초 고증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숭례문이 불탈 때 어디에 있었나요.

"TV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왜 저렇게 불이 안 꺼지나' 생각하며 발만 동동 구르다 당장이라도 현장에 달려가 직접 들어가 불을 끄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그래도 다행히 2층 전각까지만 무너져 발굴까지는 할 필요가 없겠다고 봤는데 복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발굴팀을 이끌게 됐습니다. "


▼젊은 나이지만 조선시대 궁궐 발굴에서는 손꼽히는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문화재청에 들어와서 2004년부터 3년간 경복궁의 광화문,수랏간,흥복전(사신 접견,내각회의 등으로 사용하던 장소) 등을 발굴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고고학은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돼 발굴 경험자가 워낙 적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요. 조선시대는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기록이 많아서 고고학적 조사가 크게 필요치 않다고 생각돼 왔거든요. 하지만 이번 경복궁 발굴에서 건물의 크기는 물론 방의 칸수까지도 기록과 다른 사실이 나타나면서 기존 문헌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어요. 흥선 대원군이 재건한 광화문 밑에서 조선 초에 세운 광화문 터를 찾아낸 것도 발굴의 성과죠."


▼고고학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지난해 받은 석사학위 논문 주제가 '경복궁 건물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였어요. 발굴로 드러난 경복궁 내 여러 전각들의 종류와 형태를 정리하고 이것을 현재의 궁궐 건물과 비교해 구체적인 건물의 모습과 위치까지 예측하는 내용이었죠.앞으로 조선 궁궐에 대한 연구를 좀 더 진행해보고 싶어요. 궁궐마다 역사가 다르고 구성 형식이 다른 만큼 이를 정리하고 시기별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건물 양식과 비교하는 일도 앞으로 연구할 목표입니다. "

글=노경목/사진=정동헌 기자 autonomy@hankyung.com